[조슈란지] Naked Hearts ~worst enemy~
※ 그림으로 그리려고 생각했던 이야기인데 너무 커져서 글로 표현해보았습니다.
※ 6일부터 쓰기시작해서 지금 마쳤으니 일주일 쓴 셈이네요. 말도 안되는 집중력인데...기적.
※ 처음 쓰기 시작할때는 가볍게 플롯구상한다는 식이었는데 쓰다보니 너무 맘에 드는 거에요....조슈란지 짱이다..
빌라 전쟁이 끝나고 며칠 뒤였다.
모든 것의 시작은 루시안 칼츠의 호기심.
그의 어린 호기심에서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
티치엘 덕에 두 번이나 위기를 모면한 루시안은 그 이후 티치엘의 마법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틈이 나는 대로 그 푸른 눈동자를 별처럼 반짝이면서 티치엘에게 달려가 이것저것 질문하고 금방 까먹었다. 루시안은 마법에 소질이 있는 것도,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티치엘에게 물어보면 ‘아아~그건 말이지,’하고 야무지게 대답해주는 모습이 너무나 대단하게 보였고, 그래서 계속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심지어 루시안은 티치엘의 가르침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마법소녀 티치엘은 하루에도 몇 번씩 똑같은 대답을 하면서도 전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루시안이 너무나도 재미있다며 까르르 웃었다. 오늘도 직접 만든 음료수를 나눠 마시면서 우스꽝스럽게 변한 혀의 색깔을 서로에게 자랑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다른 사람 눈으로 보아도 무척이나 귀여운 사귐이었기에 보리스도 막시민도 나란히 팔짱끼고 지켜보는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루시안이 말하길.
“있잖아. 티치엘, 있잖아. 그 때 우리 빌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마법젤리 있잖아? 있잖아, 그건 내가 만들려면 무지 힘든 걸까?”
-그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Naked Hearts
~worst enemy~
“…….”
“…….”
“…….”
“…….”
“……하아….”
모두 침묵을 안고 있는 가운데, 가늘고 긴 한숨소리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동시에 루시안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으앙, 진짜로 진짜로 너무너무 미안해서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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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얼굴로 보지 마…. 지금 내가 딱 그런 기분이란 말이야….
란지에는 가슴 안쪽이 먹먹하고 울렁거리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진짜 울고 싶다….’
그는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열려있는 문을. 너머에 보이는 것은 배정받은 지 얼마 안 된 자신의 개인 공간이다. 아니, 개인 공간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군. 이 방의 역사를 말하자면 입학 초에 빌라 간의 전쟁을 선포 받았을 당시에도 주인이 없어 홀로 습격을 받지 않았던 평화의 요새였다. 그런데 지금은….
차마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란지에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아아…아…….”
다시 한번 란지에의 신음 섞인 한숨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의 숨결은 아까보다 훨씬 크고 깊고 무겁게 바닥을 쓸고 사라졌다.
젤리, 젤리, 젤리, 젤리.
위에도 젤리, 아래에도 젤리, 좌측 우측,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온통 젤리의 참상이었다. 그것들은 끈적끈적한 점성을 자랑하며 여기저기 전염병처럼 퍼져 있었다.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꾸물렁거리는 모양이나, 덩어리로 뭉쳐 넘실대는 모양은 흡사 슬라임 같았다. 게다가 너무나도 익숙한 이 냄새! 레몬과 꿀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미칠 듯이 달콤한, 차라리 악취라고 부르고 싶은 이 지독한 냄새!
“루시안, 내가 진짜 널 한 대만 때려도 되겠냐?”
막시민의 목소리는 넘치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또다시 맞닥뜨린 끔찍한 데자뷰 앞에서 막시민은 소매를 둥둥 걷어 올리는 시늉까지 했지만 정말 때리지는 않았다. 보리스는 멀찍이 떨어져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있는 힘껏 지혜를 짜내어 보지만 떠오르는 게 전혀 없다.
당연하지.
그들의 한줄기 빛, 믿었던 마법소녀 티치엘 쥬스피앙이 무참히 패한 시점에서 그들에게 남은 카드 따윈 없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구원의 여신 티치엘은 바로 그 루시안 옆에 주저앉아 똑같이 울먹이는 중이다.
“어쩌면 좋아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온갖 시약병과 썩은 샐러리를 가득 품에 안고 등장했던 티치엘은 코를 쥐게 만드는 악취의 샐러리 시약을 순식간에 만들었고, 그 전에도 그랬듯이 온 방안에 고루고루 뿌렸다. 물론, 이번에는 시약 재료의 비율도 완벽하게 맞췄다. 그랬기 때문에 도토리 빌라의 남자들도 이미 한시름 놓은 얼굴로 티치엘에게 아낌없이 응원을 보냈다.
그랬는데, 이게 웬 일이람.
-루시안, 혹시 우리가 젤리를 만들 때 박하의 줄기를 넣었었니?
벌써 깔끔하게 떨어져 없어지고도 남았을 젤리들이 좀처럼 변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서서히 안 좋은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별 대수롭지 않게 루시안은 ‘응, 잘게 부숴서 잎하고 같이 넣었지?’라고 대답했다. 티치엘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버렸다. 그녀는 부들부들 입술을 떨었다.
-맙소사.
샐러리 시약조차 효력을 잃고, 꿈도 희망도 함께 훨훨 날아가 버린 그 때, 더 큰 재앙이 그들을 덮쳤다.
“그러니까, 한번 스스로 만들어 보고 싶어서 만들었다고?”
“응. 진짜 콩알만하게 만들었단 말이야…. 그리고서 티치엘이랑 시약을 같이 만들어서 없애려고 했다구우….”
막시민의 심문 앞에 루시안의 목소리는 불쌍하리만치 기어들어가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작게 말고서 양손의 집게손가락 끝을 꾹 맞춰 누르면서, 이따금 애기들이나 하는 코맹맹이 소리도 내곤 했다. 막시민은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짜증이 나서 쯧-하고 혀를 찼다.
“근데 왜 그 콩알젤리가 장미의 방에서 아메바마냥 번식한건데?”
그러자 란지에의 눈썹이 꿈틀했다.
“잠깐, 내가 왜 장미야.”
“넌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
정당한 항변을 단번에 내리친 막시민은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입술을 비죽이더니 ‘너 때문에 할말을 까먹었잖아!’라고 되려 란지에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루시안이 손을 들고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대답할 차례였어어….”
“알면 어서 대답해!”
티치엘이 손을 들었다.
“내가 대답할게. 젤리를 만들 때 들어간 박하의 줄기와 석영 파우더가 함께 작용해서 시약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불어나는 성질을 가지게 된 거야. 빵 반죽에 들어가는 베이킹파우더 같은 역할을 하는 거지.”
적절한 비유까지 들어가며 똑소리 나는 설명을 펼치는 티치엘의 모습에 루시안은 금방 혼나던 것도 잊은 채 감탄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정신을 못 차렸다면 손뼉까지 칠 뻔 했다.
-짝짝짝.
“훌륭해! 똑똑해! 영특해! 천재! 최고야!”
막시민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 박자 쉬고, 심호흡을 크게 한 막시민은 척-하니 손가락을 들어 굳게 닫아놓은 문짝을 가리켰다. 그 안에서는 지금도 엷은 레몬빛깔 달콤한 마법젤리들이 무서운 속도로 증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원인을 잘 알고 있으면 당장 다른 시약을 만들어봐야 할 거 아냐! 그게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똑순이! 너희 두 사람의 멋진 합작품으로 장미 쟤는 오늘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아니, 당장 나부터도 저 냄새 때문에 토할 지경이야! 숯가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얼렁뚱땅 휘말렸지만 보리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냄새가 역겨운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란지에는 방 안이 젤리바다가 되어 그 안에 있는 옷가지며 소중한 책들이 전부 젤리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데도, 오늘 밤은 정말 막시민 말대로 거실에서 자야할 판인데도, 당장은 ‘장미’ 두 글자가 더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장미냐고.’
생각은 하되, 대놓고 따지진 못한다.
“방금 티치엘이 말했잖아…. 시약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고. 저건 이제 평범한 젤리가 아닐지두….”
“멍충아! 원래도 평범한 젤리는 아니었잖아! 그럼 이제 어쩌라는 거야! 졸업할 때까지 저 징그러운 젤리를 떠안고 살라는 거야? 너희가 벌인 일이니 너희가 책임져야 할 거 아냐! 당장 가서 후루룩 먹어치우든가, 아니면 너희 둘이서 사이좋게 나눠서 잘 때 끌어안는 테디베어로 삼든가! 어쨌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향기 나는 괴물을 내 눈에서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방주인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화를 내는 통에 정작 란지에는 자기한테 닥친 일인데도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는 걸 막시민 리프크네는 알고 있는 걸까. 오히려 막시민에게 그렇게 말할 필요까진 없지 않느냐며 붙들어 말리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막시민 진정해.”
멀리서 보리스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루시안은 ‘흐에엥’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얼른 보리스에게 달려갔다. 야단맞고 엄마한테 달려가는 어린아이 같았다. 쪼르르 달려와 등에 달라붙어 어리광을 부리는 루시안을 떼어내지도 않고, 보리스는 루시안의 변호를 시작했다.
“물론, 나도 루시안이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런 위험한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리를 비우다니, 루시안 그건 정말로 네가 잘못했어. 하지만, 루시안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 물론 실제로도 그것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보고 있지만 모든 걸 루시안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화를 내는 건 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해. 그러지 말고 머리를 좀 식힌 후에 당장 대책을 마련해 보는 게 어떻겠어.”
“숯가마 너….”
보리스가 저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거의 본 적 없었기 때문에 막시민은 심히 당황했다.
“너그러이 루시안을 용서하라는 얘기가 아니야. 하지만 루시안만 떠민다고 해서 해결될 상황도 아니잖아. 일단 나는 루시안과 같이 마법학 교수님께 조언을 구하러 다녀올게. 티치엘은, 서적을 좀 더 뒤져보고 다른 시약을 궁리해줘. 막시민은 그것을 돕고.”
그리고 란지에를 바라보았다.
“루시안에게 화를 내는 건 당사자인 너에게 맡길게.”
“그래라, 장미! 너도 어서 화내! 고상한 척 하지 말고 당장 저 바보병아리한테 쏘아붙이란 말이야!”
막시민이 막돼먹은 소리를 해도 란지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제야 란지에의 머릿속에서 소중한 물건들이 순위 매김을 하며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옷 따위야 어떻게 되도 상관없지만, 지스카르에게 선물 받은 만년필이라든지, 벌써 수백 번은 읽었을 역사책들…. 그리고….
‘란즈미가 만들어 준 과자는 나무상자에 담아 서랍에 넣었으니 괜찮겠지.’
그 외, 젤리가 닿은 것들은 전부 버릴 각오를 해야 했다. 관자놀이에 격한 통증이 찾아온다. 언제 다시 장만하지….
란지에는 휘청거리는 몸을 그대로 소파에 쏟았다. 그래도 차마 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에 대고 화를 낼 순 없었다.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건 성격상 맞지 않는다.
루시안은 다시 란지에에게 매달려 싹싹 빌기 시작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진짜루 너무너무 미안해! 진짜 정말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미안해!”
“알았어. 네 맘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사과는 그만하고 보리스의 말대로 당장 저 젤리를 없애는 것부터 생각하자.”
란지에는 바닥에 무릎을 붙인 루시안을 다독여서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 루시안은 붙잡은 그의 소매 자락을 놓지 않고 계속 사죄했다. 보리스는 생각했다. 루시안이 이토록 필사적으로 미안해하는 건 한번도 본 적 없었는데….
“대신! 대신! 내가! 네 물건들은 전부 보상할게! 옷도! 책도! 책상도! 침대도! 베개도! 이불도! 아주 완전 똑같은 걸루! 전부 다 똑같은 걸루 사놓을게! 그럴게! 원한다면 더 좋은 것도 얼마든지 괜찮아! 난 돈이 무지 많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해도 돼!”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너무나도 재수 없었을 말이었지만, 루시안이 말하면 전혀 밉지 않은 것- 그것이 빛의 이름을 가진 루시안 칼츠의 특수능력이다. 어쨌든 듣던 중 아주 고마운 말이다. 란지에는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크게 안도했다.
“그리고 내가… 내가 청소당번도 전부 다 할게! 앞으로 도서관에서 책 빌려오는 것도 나한테 시켜! 내가 전부 다 할게!”
루시안은 란지에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니까 진짜로 진짜로 너무너무 미안해애…후에에….”
기어코 눈물을 찔끔 보이고 마는 철부지 도련님의 모습에 도리어 맥이 빠져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래도 자신을 용서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루시안도 자신의 저지른 짓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란지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책 심부름을 하겠다는 제안에 잠시나마 매력을 느낀 자신을 속으로 질책했다.
티치엘도 빨갛게 달아올랐던 눈가를 슥슥 비비고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서 막시민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보리스와 함께 마법학 호이오크 교수를 찾아 나서려는 루시안을 란지에가 붙잡았다.
“아까부터 줄곧 묻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뭔데…?”
사실 맨 처음 상황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거실 탁자에 올려두었다던 젤리가 어떻게 내 방으로 흘러들어온 거지?”
“그건….”
루시안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모르겠어….”
* * *
잠시 후,
말장난을 좋아하는 호이오크 교수가 문제의 방 앞에서 턱을 괴고 서있었다. 모두들 교수를 빙 둘러싸고 마른 목에 침만 삼키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희망을 긁어모아 호이오크 교수에게 보내면서. 특히나 원인을 제공한 루시안은 교수의 바로 옆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양손바닥만 비비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란지에는 아주 침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실상 그의 머릿속은 희뿌연 재가루가 휘날리고 있었다.
“저, 저…. 교수니임…. 어, 없어질까요?”
루시안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교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란지에에게 손짓했다.
“로젠군.”
“로젠크란츠입니다.”
“그래, 로젠군. 이거 문을 열어봐야 알거 같은데 좀 열어보면 안 될까?”
란지에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뭐라고 말하려 하는데 루시안이 겁을 집어먹으면서 문 앞을 막아섰다.
“안돼요! 이거 열면 큰일 난단 말이에요!”
“큰일이고 자시고, 닫혀있는 문 너머에 있는 걸 나더러 어떻게 파악하라는 거냐?”
“텔레포트인지 뭔지 써서 벽을 넘어가면 되잖아요! 그 문 열면 교수님 내일 수업은 자습을 때려야 할 겁니다.”
막시민도 한마디 거들자 호이오크 교수는 매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텔레포트랑 마법은 다른 개념이라는 거 내가 맨 첫 시간에 했던 말인데. 역시나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안경군? 내일 수업이 자습이 될지, 아니면 쪽지시험이 될지 젤리에게 직접 물어볼까? 그럼 연다-!”
그 말에 일제히 입을 열고 안 된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교수는 그보다 좀 더 빨리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이제 곧- 열리는 틈새로 기다렸다는 듯 젤리들이 쏟아지리라. 루시안은 문이 열리는 동시에 쏜살같이 달려 거실 반대편 끝으로 피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얼른 뒤로 빠졌다.
동화책 혹은 소설책에서나 경험할 만한 장면이다. 젤리더미가 교수를 머리위에서 덮치는….
“자- 어떠냐? 내일은 쪽지시험을 봐야할 거 같지?”
호이오크 교수가 말했다. 루시안은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막시민은 입만 벙긋거렸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보리스가 물었다.
“뭘 어떻게 해. 젤리가 사람을 알아보는 거지.”
젤리는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문짝에 기대고 있던 모양 그대로, 문에 새겨진 이름표나 손잡이의 음각까지 전부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그 투명한 젤리 안에서 중력을 잃고 허우적대는 침대나 책상도 보였다. 책상 서랍이 모조리 빠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란지에는 그냥 더 이상의 생각을 않기로 작정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망할 대로 망해가는 상황에 익숙해져만 가고 있었다.
“어허-! 그거 만지면 큰일 난다.”
루시안이 살곰살곰 다가가 고양이 앞발 내밀 듯이 젤리를 만지려 하자 교수님의 경고가 날아온다.
“굳은 거 아니에요?”
“그냥 움직이지 말라고 묶어놓은 거야.”
“만세! 이대로 젤리를 옮겨서 버리면 되요! 그렇죠?”
“그건 안 되겠는데?”
양팔 벌려 만세를 외치던 루시안이 도로 시무룩해졌다.
란지에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왜죠?”
“칼츠군이 실로 대단한 재능을 발휘했어. 역사에 남을 천재적인 조합법이야. 칭찬해주고 싶군. 이건 가져가서 샘플로 쓰고 싶지만 계속 불어날 테니 그건 안 되겠어.”
호이오크 교수는 아이처럼 킥킥 웃었다. 루시안은 다시 울상이 되었다. 곁으로 다가온 티치엘이 루시안의 팔을 꽉 잡았다.
…내 탓이야. 라고 책임을 함께 하겠다는 우정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막시민의 옆구리를 찌르며 ‘저 두 사람은 사귀는 거냐?’라고 질문을 던지던 호이오크 교수는 곧 얼굴에서 장난스러움을 걷어내고 최후의 대책을 내놓았다.
“전부 불로 태우는 수밖에.”
“잠시만요.”
란지에의 목소리에는 이제껏 없었던 다급함이 담겨있었다.
“그 <전부>라는 것이, 어떤 <전부>입니까?”
“젤리만 떼어내서 따로 태우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떼어낼 방도가 없으니 그냥 이대로 홀랑 날려버려야겠지?”
참으로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에게 내뱉으면서 덤으로 어떻게 태워야하는지도 알려주었다.
“간단해. 그냥 기름을 치고 성냥을 그어서 던져버려. 주변에 보호결계를 쳐놓는 거 잊지 말고. 결계를 만들 줄 모른다면 내가 도와주지. 로젠군, 너무 걱정은 하지마라. 이런 건 너희들에게서 뜯어간 수업료로 깔끔하게 보험처리를 해줄 테니까. 단, 침대 밑에 숨겨놓은 은밀한 것들은 보상이 안돼.”
“참나, 장미는 그런 거 없어요.”
막시민이 콧방귀를 뀌며 손사래를 쳤다.
“안경군은 많이 있을 것 같은데.”
“글쎄올시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란지에가 천천히 아래로 무너져 내리자 루시안과 티치엘이 양쪽에서 그를 붙잡고는 똑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우와아아아앙- 미안해!!!! 란지에!!! 정말정말 너무너무 미안해애-!! 차라리 날 때려줘-!!”
“흐아아아앙- 아니야, 란지에군! 때리려면 날 때려! 정말정말 미안해! 난 정말 구제불능인가봐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이오크 교수는 볼을 긁적이더니 옆에 막시민을 툭툭 쳤다.
“역시 사귀는 거냐?”
“글쎄올시다.”
-대책은 순식간이었다.
방주인인 란지에 로젠크란츠가 어차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빨리 쓸어버리고 리셋을 하는 것이 낫다고, 실로 냉철하고도 날카로운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모두들 마지못해 그에 따르기로 했다. 했긴 했지만-.
“진짜, 진짜 괜찮겠어?”
루시안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묻자 란지에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값진 것이라곤 없었다. 원래 가진 것도 없었지만. 가장 소중한 것들은 애초에 들고 오지도 않았다. 소중한 것일수록 멀리한다. 그것은 민중의 벗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서 몸에 배인 습관이고 짧은 청춘의 교훈이다.
몇몇 추억이 담긴 물건은…. 속이 쓰렸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달리 방법도 없고.
란지에는 오히려 코가 빨개진 채 훌쩍거리는 루시안을 달래었다.
“정말로 괜찮아. 그리고 네가 더 좋은 것으로 사주겠다고 했잖아.”
“물론이지! 세상에서 제일 비싼 걸로 해도 상관없어! 흐아앙- 미안해애-.”
루시안은 오늘 미안하다는 말만 백만번 정도 한 것 같다. 티치엘도 마찬가지였다. 성냥을 든 티치엘의 손은 차마 불을 당기지 못하고 죄책감으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누구도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보리스조차도.
그러자-.
“앗!”
란지에였다.
티치엘의 손에서 성냥을 빼어든 것은.
거침없는 손길로 불을 붙여 버렸다. 기름을 만난 불꽃이 순식간에 타올라 춤을 췄지만 결계 밖으로 나오진 못했다. 란지에는 빨갛게 노을이 진 머리칼을 살짝 걷어 올리면서 그 불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이오크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저런.
…자신을 아낄 줄 모르는 군.
* * *
“와아- 그래서 이 꼴이 된 거야?”
소문을 듣고 구경하러 달려온 아르님 소공작이 자초지종을 들은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배를 부여잡고 2인용 소파로 몸을 던진 조슈아는 그대로 데굴데굴 굴렀다. 회색 머리칼이 공중에 예쁘게 흩날렸다.
“루시안 칼츠! 넌 정말 최고야! 난 그래서 네가 너무 좋아! 내가 이 학원에 와서 제일 좋았던 건 너와 친구가 된 거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어! 하하하!”
“지, 진짜?”
소공작의 뼈 없는 칭찬에 곧바로 수줍어하는 루시안을 옆에 있던 막시민이 가볍게 꿀밤을 때려 먹였다.
“인마, 넌 반성해.”
“넵….”
막시민에게 한대 맞은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카탈로그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가구들을 모아놓은 카탈로그였다. 침대, 책상, 의자, 서랍장…. 또, 뭐가 필요하더라? 하나하나 직접 고르고 있었지만 그런 데에는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루시안은 선뜻 택하지 못하고 계속 머뭇거렸다. 결국 옆에서 막시민이 핀잔에 가까운 어드바이스를 날려준다.
“야, 침대 하나 넣으면 사람 들어갈 공간도 없겠다. 방 크기를 생각하면서 고르라니까?”
소파에 바로 누워 가까스로 정신을 추린 조슈아는 루시안 옆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편입생군은 이런 오프 화이트가 어울려’라고 주관이 섞인 조언을 던지며 이거 사라- 저거 사라- 손가락으로 갖은 참견을 부리더니 곧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산만한 동작에 막시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뭘 찾아?”
“그래서 방주인은 어디 갔는데?”
“너같음 여기 있고 싶겠냐?”
막시민은 탄광이 되어버린 작은 공간을 흘깃 쳐다보고는 쯧쯧 혀만 찬다. 조슈아도 한숨만 내쉬었다. 루시안은 다시 울고 싶어졌다.
란지에 로젠크란츠. 그 가련한 이름을, 그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못내 안쓰러운지 막시민은 진심으로 가엾다는 표정을 지으며 창밖 너머 먼 산을 바라본다.
심신에 쌓인 피로를 풀어야 할 휴일에 이런 재난을 당하다니….
“도서관에 도 닦으러 갔수다.”
란지에가 재난 현장으로 되돌아온 것은 소공작이 난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습관처럼 책을 한 아름 안고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오도카니 서있었다.
-맞다, 전부 불에 타고 재만 남았지….
눈치껏 얼른 달려가 책을 챙겨 받은 것은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은 여전히 란지에만 보면 울상을 지으며 미안하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남의 불행을 즐기던 조슈아 폰 아르님은 이제 좀 진지하게 상황파악이 되는 모양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어쨌든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있잖아, 있잖아. 내가, 내가 나올 테니까 당분간은 내 방을 써!”
언제 챙겨 나왔는지 간단히 세면도구와 잠옷을 품에 안은 채 루시안이 그렇게 말했다. 덧붙이길, 자기는 보리스 방에서 자면 된다고 했다. 물론 보리스는 루시안의 말을 다 듣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 루시안.”
란지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양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주먹을 꼭 쥐고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안돼! 이대로는 미안해서 죽어버릴 지도 몰라! 미안해서 죽는 사람이 없다 해도 이제 내가 그 최초가 될지도 모른다구! 그러니까 날 살리는 셈 치고 부디 내 방에서 자! 난 오늘 밤 보리스의 방에서 물구나무라도 선 채로 잠을 잘 테니까!”
그러자 보리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네가 침대에서 자-’ 라고 말하려다 분위기를 봐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서 죽을 지경인 루시안 때문에 오히려 미안해 죽을 지경인 란지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루시안을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좀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이러다가는 간도 쓸개도 빼주겠다고 설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란지에는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또 고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시안. 진짜, 정말, 너무너무 충분히 네 마음을 알겠어. 그리고 나도 진짜, 정말 정말 하나도 화 안 났어. 처음부터 난 화를 내지 않았으니까. 이제 진짜로, 정말로, 그만 미안해도 돼.”
평소 루시안이 즐겨 쓰지만 란지에 본인은 결코 가볍게 쓰지 않는 수식어들을 몽땅 갖다 붙여가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자 갖은 노력을 한다. 루시안은, 전부는 아니어도 절반 이상은 이해했는지 입술을 쑥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미안해.”
라고 말하긴 했지만.
“내 방으로 와.”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쏟아졌다.
주목 받는 것엔 너무나 익숙한 조슈아는 양 손을 크게 펼치고 뭐 그리 대수냐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창문이고 문짝이고 전부 날아가 뻥 뚫려있는데 이런 와중에 거실에서 잤다간 초봄이라고 해도 감기 걸려. 내 방은 손님용 방이 따로 있으니까 거기서 묵으면 되잖아. 안 그래?”
막시민도 무릎을 탁 쳤다.
“그거 괜찮네. 그래라, 장미야. 조군 놈의 방은 얄미울 정도로 크니까 가서 마음껏 깽판 치다 오도록 해. 그동안 그야말로 재가 되어버린 네 방은 저기 저 바보병아리랑 얄미운 똑순이가 깨끗하게 원상복구 해둘 거야. 문짝에 이름표 대신 장미를 걸어두는 건 내가 해줄 테니 안심하라고!”
“맞아! 그게 좋을 거 같아!”
여론이 하나 둘씩 조슈아에게 기울었다. 정작 란지에는 난색을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 그냥 거실에서 잘게. 그보다, 막시민….”
보다 더 신경 쓰고 있는 문제를 제기하려는데 루시안이 뛰어들었다.
“안돼! 란지에, 조슈아 말 못 들었어? 거실에서 잤다간 감기 걸릴 거야. 넌 특히나 약해 보인단 말이야. 그냥 조슈아네 방으로 가면 안 될까? 조슈아는 소공작님이기 때문에 방도 엄청 좋단 말이야. 응? 응? 으응? 여기서 잤다간 절대로 무조건 감기에 걸리고 말 거야…!”
친구의 방을 통째로 날려먹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겁고 괴로워 미칠 것 같았던 루시안은 란지에에게 제발-제발-하며 본격적으로 보채기 시작했다. 아마 루시안은 오늘 밤 란지에가 거실 소파에서 몸을 구긴 채 자는 모습을 보았다간 미안해서 죽지는 않아도 그대로 기절해버릴 것이다. 어쩌면 자기도 벌을 받겠다고 거실로 뛰쳐나와 정말 물구나무를 설지도 모르고.
“절대로 무조건 감기에 걸리진 않을 것 같은데.”
“아냐! 절대로 무조건 감기에 걸려!”
란지에도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조슈아의 제안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사실 별로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세세히 따져보면 나쁘다고 말할 이유도 없는 조건이고.
하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조슈아 폰 아르님.
란지에는 루시안에게 어깨를 붙들린 채 정신없이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소파에 앉아계신 소공작에게 닿아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탈로그를 넘겨보고 있는 조슈아.
‘싫지는 않지만.’
싫거나, 대하기가 어렵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과연 내가 저 소년에게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그런 문제였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호의가 아닌 ‘빚’으로 남게 된다. 조슈아 본인은 아니다 하더라도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아르님 공작가에 이미 큰 빚이 있었다. 목숨이 연결된 아주 큰-.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 싫으면 말아.”
‘꼭 그렇다기 보다….’
저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괜히 마음이 움직여버리는 것이 란지에 로젠크란츠다. 그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데모닉이고. 그리고 란지에는 이 어린 데모닉이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겉으로 덤덤해 보이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짜릿한 신경전이 오고갔다.
조슈아는 손을 뻗어 탁자 위를 굴러다니는 펜을 들었다. 그 짧은 동작에도 선천적인 우아함이 배어있다. 그는 아까부터 훑어보던 가구 카탈로그를 처음부터 펼쳐놓고 휘리릭 페이지를 넘겼다. 중간 중간에 낙서하듯 동그라미를 그려 넣으면서. 그러고 조슈아는 탁 소리가 나게 카탈로그를 덮었다.
“루시안. 이걸로 해.”
그의 손에 들려있던 펜이 경쾌한 호를 그리며 소파 쿠션으로 떨어졌다.
“자, 정했으면 가자.”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란지에의 팔을 잡았다. 순간 당황한 란지에는 손을 확 뿌리치며 곱지 않게 눈을 흘겼다. 경계가 가득한 눈빛, 그것은 그가 여기 온 이후 한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얼굴이었다.
“아직 안 정했어.”
“아니, 넌 정했어. 네가 인정하기 싫은 것뿐이지.”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이 자 앞에서 쓸데없는 자존심 따윈 무의미하다고 누군가 그렇게 자신을 인도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저 풍부한 자신감에 그냥 몸을 맡기는 게 좋겠다고 아주 잠깐이나마 그렇게 생각한 란지에는 이미 패배자였다. 백기를 들고 순순히 그를 따라 나설 수밖에.
승패가 나버린 게임에서 미련을 남기는 건 패배를 인정하는 것보다 굴욕이다.
“에휴.”
체념의 한숨소리. 그것이 썩 마음에 든 조슈아는 사근사근한 미소를 드리우고서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 미소는 읽어본 적도 없는 동화책에 등장하는- 곧잘 모습을 감추며 앨리스를 조롱하던 고양이와 닮지 않았을까?
자신보다 약간 더 높이 서있는 상대를 빤히 쳐다보던 란지에는 내밀어진 손에 책을 올려주었다.
“어라.”
“들어줘.”
“루시안 칼츠가 사고 쳤다지? 장미, 너도 참 고생이다.”
“여어, 장미! 얘기 들었다! 이참에 칼츠한테 위자료를 뜯어내.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합쳐서 엘소 금화 5천개쯤?”
지나가면서 만나는 동급생들마다 똑같은 화재와 호칭을 입에 올렸다. 덕분에 그것을 퍼뜨리고 다녔을 용의자 범위는 한명으로 좁혀졌다.
‘막시민 리프크네….’
그에게 진심으로 살의와 비슷한 것을 느낀다면 너무한 걸까? 이미 란지에는 자신을 이런 처지로 내몬 금발남매보다도 자신을 꽃으로 만든 안경군이 더 미웠다.
그리고-
동급생 그것도 남자에게 장미를 갖다 붙이는 다른 녀석들도.
란지에는 전부 무시하며 지나쳤다. 뭐라고 대꾸할 기운도 없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그들은 <역시 생각했던 대로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차갑다>고 하면서 어쩐지 좋아하는 것이었다.
앞서 걸어가는 조슈아의 품에도 책이 서너 권, 뒤에서 따라오는 란지에의 품에도 책이 서너 권 들려있었다. 모두 다 하나같이 너무나도 두꺼워서 그대로 들고 휘두르면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것 같았다. 조슈아는 팔이 빠질 것 같다고 엄살을 부렸다. 덤으로 도대체 도서관에서 여기까지는 어떻게 들고 왔는지 궁금하다고 투덜거리기까지.
란지에는 조금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가끔씩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지.”
“아니 내가 볼 때 너는 초인 그 자체인 것 같은데.”
“사람이야. 나도 들고 오느라 진땀 뺐어.”
“그럼 진땀 빼지 않을 만큼만 들고 오라고. 이런 건 너 말고는 아무도 안 읽을 테니 아무도 안 빌려갈 거야.”
“…심한걸.”
“심한데 정말이야.”
란지에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조슈아도 따라 웃었다. 그것이 화음이 되어 복도에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썩 좋은 화음은 아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아주 약간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무거우면 이리 줘.”
그 말이 어디가 그렇게 웃긴 지 조슈아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됐어! 남자가 둘이 있는데 한명만 짐을 들면 그건 또 무슨 우습지도 않은 꼴이야.”
“그럼 불평하지 말고 들어.”
“그러려고-.”
가볍게 던지는 대화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살얼음을 톡톡 두드린다.
책 이외의 짐은 없었다. 알다시피 전부 재가 되어 훨훨 날아가 버렸으니-. 나머지는 조슈아가 전부 준비해주겠다고 말했고 란지에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앞장서던 조슈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이봐, 장미.”
그러자 란지에의 표정이 험하게 돌변하더니-.
“그렇게 부르지 마.”
심히 짜증스럽다는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통에 알만한 녀석까지 보태주니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져 부아가 치민 것이다. 조슈아는 그의 반응이 좀 의외인 듯 당황했다.
‘…이 녀석, 진짜로 화를 내고 있잖아?’
여기서는 일단 미안하다고 숙이는 것이 대화의 정석일 텐데 조슈아는 오히려 따지고 들어온다.
“하지만 다들 부르잖아? 나만 차별하는 거야?”
“막시민만 부르는 거야. 멋대로. 자기 멋대로.”
절대 자신은 허락하지 않았음을 누차 강조한다.
“그럼 거기에 나도 끼워줘. 난 막시민의 오랜 친구거든.”
전혀 들어맞지 않는 논리를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은 그의 오랜 친구에게서 배운 버릇인가, 조슈아는 참으로 맹랑하게 ‘괜찮지?’하고 상대의 동의를 구했다.
란지에는 지친 듯 쌀쌀맞게, 그러나 체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맘대로 해.”
이러다 전교생이 다 나를 장미라고 부르는 건 아니겠지….
솔직하게 더 털어놓자면 이제 꽃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꽃은 장미가 되어버릴 것 같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러는 건지 막시민 본인에게 따져들어보고 싶다. 하지만 그는 아무생각 없었을 것이 분명하고, 상대가 싫어한다고 해서 그만둘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즐길 것이다. 뻔히 내다보이는 파노라마가 란지에를 더욱 막막하게 한다. 깨닫고 보니 막시민 앞에서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극히 몸을 사리는 자신이 있었을 뿐이다.
“하하하!”
갑자기 조슈아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복도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웃다니 명백한 민폐였다.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드는 여럿 시선이 느껴진다.
“그냥 해본 소리야. 장미라니…. 그런 닭살 돋는 별명은 막시민이니까 부를 수 있는 거야. 나는 그냥 이름을 부를게. 란지에.”
그러고는 눈을 예쁘게 접으며 씩 웃는다. 란지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짓궂은 소공작에게 보기 좋게 당한 것이다.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껴 란지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조슈아를 지나쳤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모르겠어.’
저 미소는 태양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눈이 내리는 허허벌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그저 아름답다 찬양하겠지만 아는 사람 눈에는 그 거센 눈발이 또렷하게 보인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후자였다. 저런 거짓된 미소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도 같아.’
…똑같으니까, 알 수 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거웠던 것은 기분 탓이리라.
신기하게도 3층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상급생들은 신입생들처럼 에너지를 낭비하는 법이 없으니까, 지금쯤 다들 각자의 장소에서 학업정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을지도.
평소의 동선이 극히 한정되어 있는 란지에는 한층 위로 올라왔을 뿐인데 등을 훑고 지나가는 낯설음에 자신도 알게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용케 놓치지도 않고 조슈아는 손가락질하며 놀렸다. 매일 매일 도서관에 처박혀서 책만 읽으니까 그런 거라는 충고에 란지에는 수업도 자주 빼먹는 녀석에게 들을 충고가 아니라고 지지 않고 반박했다.
“그러게. 우리 둘 다 은둔형 폐인이네?”
“난 아냐. 난 적어도 움직여.”
란지에가 딱 잘라 부정했다. 조슈아는 피식 웃으며 수긍했다. 발에 차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헛발길질을 하는 조슈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란지에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자탄하지 말고 수업에 나오는 게 어때?”
“배우지 못하는 내가 수업에 나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돌아오는 질문. 고운 미성에 짓이겨져 있는 감정은 놀랍게도 증오였다. 그 살벌한 아우라에 놀란 란지에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 했다.
“…….”
천천히 돌아서는 조슈아의 얼굴은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무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난 듯도 하고, 온갖 잡다한 것들이 어지럽게 얽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빈껍데기만 남고 모든 것이 전부 사라져버렸다. 색이 없는 가면.
란지에의 눈동자에는 무방비한 놀라움만이 남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에 동요하고 있었다.
“배워서 깨우치는 즐거움은, 나한테 없는 거야.”
조슈아가 말했다.
하지만 란지에는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진홍색 눈동자에 쓸쓸한 데모닉의 얼굴이 새겨진다.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로 앞에 놓인 상대방만 바라보는 그 몸뚱이는 무언가에 결박당해 움직일 수 없는 것 마냥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고받는 고요한 시선에서 떠오르는 것은 심해(深海).
심해(深海)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검고 차디찬 공간.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들은 전부 정상이 아니다. 궁극적인 생존만을 추구하며 일그러진 모양으로 살아가는 심해어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메마른 포식자의 길을 택한 그들에게 ‘사랑’은 애초에 없었다.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슬픔과 분노, 이성을 잃어버린 잔인함 뿐이다. 그것은 절대로 정상이 아니다.
란지에는 생각했다.
‘그래. 난 이걸 피하고 싶었던 거야.’
이 사람만은, 피하고 싶었다. 저 눈을 보면 지독한 암흑 속을 홀로 유영하는 감각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피할 수 있을까? 뭍에서 바라보는 심해는 매혹적인 존재다. 손이 닿지 않아 더욱 갈망하게 되는 그 곳. 더러운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 그 위험한 아름다움에 무심코 손을 뻗게 되겠지. 한번 잡혀버리면, 그대로 삼켜져버리면, 두 번 다시 수면 위로 나올 수 없는데. 마치,
-데모닉(Demonic)이야.
“너도 퍽이나 똑똑해. 보면 알아. 하지만 넌 아직도 배울 것이 많아. 흥미도 느끼겠지. 도서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거나, 무거운 것도 모르고 그 품에 책을 안거나…. 하지만 난 아냐. 내게 그런 건 없어. 그게 너와 나의 차이점이야.”
“…….”
“나는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 알게 되는 순간 내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턱없이 허무해져. 알아버리는 순간부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곳에 침전물이 되어 쌓이거든.”
이 곳-. 자신의 머리였다. 미치도록 뛰어난 두뇌. 악마 같은 천재성.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깊고 검은 바다 속을 더듬고 있는 듯 했다. 란지에는 전부 알아듣고 이해한 건지, 몹시 견딜 수 없다는 듯 아련한 빛을 드리운 채 조용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습지만, 난 네가 부럽다.”
하지만 시선을 먼저 거둔 것은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위에 드리워진 차양커튼을 걷어냈다. 아니, 잡아뜯어냈다고 봐도 좋다.
연한 노란빛의 레이스커튼을 팔에 둥둥 휘감으면서 조슈아는 란지에를 바라보고 피식 웃었다. 아까는 그렇게 화난 얼굴로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았으면서, 지금 그런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느긋하고, 자신감 넘치는, 여유롭고 아름다운 미소.
평소의, 누구나 좋아하는 아르님 소공작이다.
“당분간 노란색은 꼴도 보기 싫을 거 아냐? 전부 치워야지.”
그것 참…. 눈물나도록 감사한 배려로군.
별다른 반응 없이 가까이에 놓인 원형 테이블에 책을 내려놓고 팔을 주무르는 란지에에게 조슈아가 물을 한잔 내밀면서 말했다.
“홍차가 있는데, 내가 우려내면 마실 수 없게 되더라고. 막군이 마시고는 나한테 도로 뿜었거든. 잊고 싶은 끔찍한 기억이지.”
입에 담은 차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이게 지금 마시라고 내놓은 거냐며 조슈아의 목을 조르는 막시민의 모습이 절로 떠올라 란지에는 쿡쿡 웃었다.
“괜찮다면, 재워주는 답례로 내가 나중에 차를 대접해도 될까?”
내친 김에 창문의 커튼도 전부 뜯어내려고 의자를 창가로 옮기던 조슈아가 그 말에 반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정말.”
란지에는 물을 마시면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특별실이라더니, 일반 기숙사하고는 확실히 달랐다. 공간도 훨씬 넓었고, 천장도 훨씬 높았다. 바닥재도 도토리 빌라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고급스런 융단이 깔려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이 앉아있는 테이블 밑에 깔려있는 것은 딱 봐도 귀한 모피였다. 괜히 미안해져서 밟고 있던 발을 슬며시 치우며 거실을 죽 둘러보던 그는 원래 여기 있었을 게 아닌 가구를 이제야 깨달았다. 맨 처음 거실에 들어왔을 때 바로 보였던 침대다.
“…거실에 침대가 있네….”
“응. 답답해서 옷장하고 전부다 거실로 꺼내달라고 했어. 어차피 올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저쪽 방은 지금 초토화야.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아.”
란지에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눈을 돌렸다. 앤틱한 느낌을 주는 고즈넉한 전체 분위기에 비해 창가에 가져다 놓은 작은 화분들이나 좀 전에 침대에 걸려있던 차양, 벽에 걸린 자잘한 그림들은 최근의 세련됨을 간직하고 있다. 소공작을 위하는 학원의 정성이 하나하나 드러나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에 속으로 감탄하던 란지에는 곧 다른 것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가령, 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가 두 켤레라든지…. 지금은 없지만, 아마도 있었을 또 한명의 기척이 어렴풋이 그 안에 맴도는 것을 감지했다.
“룸메이트가 있었나?”
“아아, 있었지.”
조슈아는 체중을 실어 커튼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란지에는 실로 놀라웠다. 이 곳은 방이 붙어있긴 하나 어떻게 봐도 1인실로 보였기 때문에, 게다가 조슈아가 누구와 생활공간을 공유할 정도로 허물없는 성격으론 보이지 않았으니까…. 지금 그 생활공간을 나눠받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는 이어서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그러자 딛고 올라섰던 의자에서 내려와 뜯어낸 커튼을 바닥에 던져놓고는 이쪽을 쳐다보았는데 그 눈이 어찌나 우울한지 또 한번 란지에의 가슴을 동하게 한다. 심장을 움켜쥐고 싶을 정도로 슬픈 그의 감정에 휘말려버린다.
“사정이 생겨서 떠나버렸어.”
“그래….”
란지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쩐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을 건드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가 건네준 예쁜 유리컵을 지분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을 떨어뜨려놓았다.
“뜯어놓기는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분위기를 바꾸는 건 분위기를 가라앉혔던 장본인의 몫이다. 조슈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것 좀 보라며 커튼이 보기 싫게 떨어져나가 참혹해진 커튼봉을 가리켰다.
하아…….
란지에는 조슈아와 창문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어쩔 셈이야.”
라고 한마디 붙였다.
“좀 도와줘.”
조슈아가 계면쩍은 웃음을 흘린다. 그 얼굴이 퍽 귀엽게 느껴져서 란지에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만지작거리던 유리컵을 테이블에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군.
“핀을 제거해야지, 그렇게 무식하게 잡아 뜯으면 갈아 끼울 수가 없잖아. 자기 입으로 똑똑하다고 말했으면서 이럴 땐 슬기롭지 못한걸.”
차갑게 쏘아붙이면서 란지에는 어느덧 옆으로 다가와 함께 상황을 살폈다. 조슈아는 조심스레 그의 곧게 뻗은 턱 선으로 곁눈질 했다. 이미 머릿속에 커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대충 대꾸를 하면서,
“미안, 미안. 핀이 따로 있는 거야?”
계속 보고 있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를.
“일부러 그런 거지?”
“아니야. 진짜 몰랐어. 나도 사람인데 너무 그러지 마.”
조슈아는, 그가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그의 외모를 보고 그런 건 아니다. 외모에 신분격차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귀족이라고 다 예쁜 것도 아니고 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건 귀족인 조슈아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란지에 그는 지나치게 우아하다. 걸음걸이, 화법, 작은 손짓, 하다못해 물을 마시거나, 하품을 하거나,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백조와 같은 기품이 흘렀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맹훈련을 받지 않고는 어지간해서 저렇게 몸에 배기 힘들 텐데. 아마 그는 귀족들의 예법도 전부 꿰고 있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물론, 물론 얼굴도 아주 훌륭하다.
조슈아는 여자아이들이라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그의 반반한 이목구비보다 더 깊은 것에 끌리고 있었다.
좀 전에 자신이 건네준 유리컵보다 무거운 것은 들어본 적도 없을 거 같은 가냘픔과 설령 지옥 불에 떨어져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절대 굽히지 않을 것 같은 지의(志意), 긍지(肯志), 자존심(自尊心). 그것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란지에 로젠크란츠. 너도 나만큼이나 괴짜구나.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애초에 왜 커튼을 뜯은 거야?”
란지에가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조슈아는 눈을 돌렸다. 이거 심장에 나쁜데. 험험, 마음 속 헛기침으로 표정을 추스르고 평범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다 널 위한 거였는데?”
하아? 란지에는 진심으로 그런 조슈아를 바보 보듯 했다.
“난 부탁한 적 없는데?”
“그랬던가?”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란지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다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훤히 드러난 커튼봉은 남은 커튼의 찌꺼기를 누더기마냥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조슈아가 사다리를 가져오자 란지에가 딛고 올라섰다. 그가 커튼핀을 제거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을 때 아래에서 사다리를 붙잡고 있던 조슈아는 가만히 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깨끗하게 청소되어 얼룩 한점 없는 유리창에 선명하게 투영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오자마자 남의 방 커튼이나 갈고 있고…. 차를 대접받아야하는 건 오히려 나 같은데?”
아주 보기 좋게 망가진 커튼핀들을 모아다가 조슈아에게 건네면서 란지에가 말했다.
투덜거리는 말이었지만 그 목소리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농담은 안하는 줄 알았는데, 짧게 공유했던 시간 속에서 조슈아에게 물이 든 모양이다.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조슈아는 기가 찬 듯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도 내 얼굴에 뿜으려고?”
“할 수 있다면 해보고 싶은 경험이지만….”
남은 커튼핀을 마저 조슈아의 손바닥에 떨어뜨려주면서 란지에는 온화하게 웃었다.
“유감이야. 난 맛없는 차도 잘 마시거든.”
조슈아는 그 미소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눈동자에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담아버렸다.
평생 잊어버릴 일은 없을 데모닉-. 그 운명을 타고나게 해준 부모님께 그리고 조상님께 감사하면서 조슈아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눈꺼풀을 열자 유리를 뚫고 들어온 빛이 눈부실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어둠을 삼키고 있던 잿빛 눈동자에 단 한사람의 실루엣이 그려졌다.
새하얗게 나부끼는 빛줄기 안에 그가 있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을 살랑이면서, 커튼을 걸고 있었다.
그 곳에 심해는 없었다.
커튼을 새로 갈고, 하는 김에 방 청소까지 분담하여 끝낸 두 사람은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종종 유연한 농담을 던지기도하고, 장난스럽게 웃기도 했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차(茶)를 들고 있었는데, 그 차는 결국 란지에가 내온 것이었다.
“내 차를 시음해 보는 거 아니었어?”
라고 조슈아가 말했더니 란지에는 빙긋 웃으면서,
“맛없는 것도 마실 수 있다고 했지, 맛을 모른다고 하진 않았어.”
라고 답했다. 농담에 서투르게 생겼으면서 알고 보면 말재주가 여간내기가 아니다. 이젠 그가 무슨 말로 놀라게 해줄지 기대된다. 흐응- 하고 조슈아는 태연한 척 그가 따라주는 차를 천천히 들었다.
제법….
조슈아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본 란지에는 자신도 한 모금 마시더니 심심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한다. 유감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보아하니 원하던 결과가 아닌 모양이다. 그가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나를 보살펴 주던 분이 차를 정말 맛있게 잘 끓이셨는데…. 거기엔 미치지 못하네. 역시 재능이셨어.”
보살펴 주던 분이라….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진한 흥미를 느낀 조슈아는 좀더 파고들었다.
“어떤 분인데?”
“그냥 좀….”
란지에는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저물어가는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언젠가, 지스카르와 나누었던 담소가 떠올랐다. 그때도 꼭 이렇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수호 요정이 있다고 했던가, 성격이 특이해서 방랑벽이 심한 자손만 보호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스카르, 당신은 정말 넘치도록 보호받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추억을 더듬던 란지에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번졌다.
“근사한 괴짜?”
그는 말을 마치고는 쿡쿡 어깨를 떨며 웃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잔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농담을 던진다.
“그래서 네가 이렇구나?”
“당신만 하겠어? 무책임 황태자.”
그러자 조슈아는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푸른 머리의 달변가는 조용히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목으로 넘겼다.
해가 지고 있었다.
차마 웃지도 못할 해프닝이 있은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같았다. 그만큼 란지에도 즐거웠다.
아르님 소공작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란지에는 생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데모닉에게 빚지는 게 내 운명인가.’
이따금씩 아려오는 왼쪽 손목을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란지에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리곤 다시 소공작의 빈 잔에 차를 따라주며 자신의 뜻을 전했다.
“고마워.”
“뭐가?”
“뭐든.”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조슈아는 굉장히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를 오묘한 미소를 남긴 채 들고 있던 찻잔에 담긴 차를 한번에 마셨다. 아릿한 시나몬향이 이름모를 꽃향기와 어우러져서 입안을 맴돌았다.
붉게 물든 하늘이 그들의 각자 다른 머리카락 빛깔을 같은 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처음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를 떠올려본다.
낯선 환경, 낯선 이들. 그 가운데 아는 얼굴은 둘 뿐이었고, 그 중 한 명은 다시 만났을 땐 모르는 사이가 되기로 했던 자였다. 그리고 기대에 가득 차올라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들 사이에서 딱 한 사람만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책장을 빠르게 넘기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눈이 마주쳐버렸던 것이다.
그때 알았다.
그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악연을 그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아르모리크 경,
-데모닉 조슈아.
그를 인식한 순간,
그가 누군지를 인식한 순간,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른 판단이 뇌리에 잡혔다.
『절대 다가가선 안돼.』
하지만,
‘…그랬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는 옛날이야기지.’
다 비운 찻잔을 내려놓으며 란지에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흘렀다. 우습게도, 지금은 그 자와 이렇게 마주 앉아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란, 지독하리만치 제멋대로 흘러가는군.
얼굴에 보이지 않는 그늘을 드리운 채 그는 상대방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고맙다고….
그리고….
* * *
씻고 나와서 조슈아가 준비해준 잠옷으로 갈아입은 란지에의 얼굴은 묘하게 발그레한 것이 기분도 무척 좋아 보였다. 보통 학생들이 사용하는 공동 세면장은 툭하면 어디가 고장 나서 온수가 끊기곤 했다. 그때마다 원치 않는 냉수마찰을 당하면서 새된 비명을 지르다가 데운 물 넘치는 풍족한 환경에 놓이니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뜨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에 어깨까지 폭 담그고 있으니 란지에는 매일 이렇게 목욕하는 조슈아가 새삼 부러워졌다.
어쨌거나 란지에는 잘 씻고 기분 좋은 얼굴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저쪽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던 조슈아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에, 그쪽 방에서 자려고? 여기 침대도 무지 큰데.”
그 말에 란지에는 눈살을 확 찌푸린다.
새삼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애당초 손님용 방에서 묵으라고 자신을 끌고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란지에는 일단 덤덤하게 대꾸를 해본다. 그랬더니 아니다 다를까.
“여기서 같이 자면?”
“거절.”
미처 조슈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란지에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얘기가 나오리라 벌써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조슈아도 그의 이런 메마른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일언지하로 거절할 것까지야….
‘역시 쉽지 않은 상대네.’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고 했던가. 조금 친해지는가 싶더니 도로 가시를 세워 꽃잎을 보호한다.
막군, 진짜 별명 한번 잘 지었구나. 조슈아는 처음으로 막시민의 엉터리 작명 센스에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
“너무 그렇게 차갑게 굴지 마. 막군이 그러는데 남자는 모름지기 같은 이불을 덮어봐야 진짜 우정을 느끼는 거랬어.”
가시를 떼어내기 위해 조슈아가 막군을 빌려 살살 구슬려보지만,
“그럼 그 죽마고우랑 동침해.”
그게 먹힐 턱이 있나.
란지에는 막시민 그의 이름과 함께 가까스로 잊고 있던 꽃 이름이 떠올라 속이 불편한지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조슈아를 흘기면서,
“나에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무슨 뜻? 조슈아가 멍한 얼굴로 입을 여는데 그보다 먼저 란지에가 앞질러 선수를 쳤다.
“아까 날 훔쳐봤잖아.”
맙소사….
조슈아의 모든 동작이 굳어버렸다.
지금 설마 심장이 땅으로 떨어졌나? 쿵-하고 뭔가 추락하는 환청이 들렸는가 싶더니 동시에 급속도로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는 얼른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는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지금 그가 보인 반응만으로도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마법학 교과서를 처음 펼쳤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당황스러웠다. 머리를 해머로 얻어맞은 것 같다. 이 궁지에서 어떻게 헤어나갈까, 멈춰버린 사고회로를 더듬느라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조차 모르고 쩔쩔매는 조슈아를 란지에는 참으로 냉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팔짱까지 끼고는 이쪽을 보는 모양이 어찌나 무덤덤한지 처음으로 그가 얄미워졌다.
…이거야 원. 할말 없게 만드네.
조슈아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나쁜 짓을 하다 걸려도 무조건 당당하고 보라는 것이 그의 친구의 가르침이었지만 일단 몰래 훔쳐본 것에 대한 사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훔쳐본 건 미안했어. 불쾌했어?”
그러자 란지에는 입을 다물고 잠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두세 번 천천히 눈을 깜빡이면서 머릿속을 정리하더니 더욱더 조슈아를 당황하게 하는 말을 던진다.
“내 얼굴이 맘에 든 거야?”
앞뒤 다 자르고 알맹이만 남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조슈아는 속으로 ‘이 녀석의 사전엔 수줍음이나 부끄러움이 없는 건가?’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어떻게 대답해야 그가 안고 있는 오해를 타파할지, 좋은 선택지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아 끙끙 앓는다.
“네가 오해하고 있는 그런 게 아니야.”
진심과 용기를 짜내어 한 대답이었는데.
“알아. 그냥 묻는 거야. 내 얼굴이 취향이야?”
“그게 그거잖아!”
조슈아가 강하게 반박했다. 그의 볼멘소리엔 억울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펼쳐든 양손으로 고운 얼굴을 마구잡이로 부비는데,
“거울을 보는 게 어때? 난 소공작의 얼굴이 훨씬 더 근사하다고 생각하는데.”
후후- 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곧 큭큭-하고 짓궂은 소리로 바뀌어 그제야 조슈아는 그가 농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너 진짜!”
침대에 놓인 베개를 집어 들어 곧바로 그에게 날려버리는 조슈아의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 같았다. 베개를 가볍게 받아들고 그는 ‘미안, 그쪽이 너무 심각하게 반응해서 그랬어.’라며 하하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웃는 것도 처음 봤다.
사실은 이게 그의 <진짜 얼굴>이 아닐까?
언제나 냉정한 눈으로 한발 뒤로 물러서서 누군가 다가오면 표독스런 눈으로 가시를 세우는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 자신을 알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릴 것 마냥 몸을 사리며 자신을 감추는 그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 지금 저렇게 농담으로 친구를 곯리고 웃음을 터뜨리며 솔직하게 즐거워하는 저 모습이야말로-.
란지에 로젠크란츠의-.
‘그리고 나도…. 내 얼굴도….’
조슈아는 목이 달아 침을 꿀꺽 삼켰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베개를 잡아 다시 그에게 던졌다. 그대로 주고받기만 하는 얌전한 베개싸움이 이어졌던 것이다. 물론 얌전하게 주고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느릿느릿 오고가던 베개에는 어느덧 속도가 붙어 이젠 날아오는 베개를 받는 것 보다 상대방의 얼굴을 때려 맞추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등시간이 다가오는 가운데, 북탑 기숙사 3층 맨 안쪽에 위치한 특별실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질 않아, 아르님 소공작이 얼마 전 들어온 편입생하고 우아하게 베개를 던지며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깥양반들은 전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리 썩 좋은 체력을 자랑하진 못했기에 얼마 가지 않아 땀으로 진탕이 되어 침대 위에 나란히 쓰러졌다. 마치 기숙사 마당을 열 바퀴 정도 뛰고 온 사람 마냥 숨을 헐떡거리면서 누가 먼저 더 많이 얻어맞았나 머릿속으로 셈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세 번이나 더 맞았네? 전부 기억하고 있는 데모닉은 모른 척 시치미 뚝 떼고 ‘네가 졌어.’라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네가 세 번 더 맞았거든. 다 알면서 모른 척 하지 마. 사기꾼.’이라고 쏘아붙인다.
이 맹랑한 녀석, 그걸 세면서 던졌냐…. 게다가 이젠 사기꾼이라느니 하는 말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야, 너…. 원래 이런 녀석이야?”
“아니었던 거 같은데, 고귀하신 아르님 소공작 전하께 옮았나봐.”
끝의 끝까지 장난을 주고받으면서 뭍으로 끌려나온 돌고래마냥 침대 시트위에 늘어져서는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천천히 가쁜 숨을 고르면서 서로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휴, 씻고 나왔더니 다 젖어버렸네. 다시 씻어야 하잖아.”
먼저 등을 돌리고 돌아누운 것은 조슈아였다.
“누가 아니래.”
그렇게 받아치며 란지에도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서로에게 등을 보이고, 정적 속에서 아직 덜 가라앉은 숨소리만 오고갔다.
“맘에 들어.”
-라고 조슈아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건너편 상대에게는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가 귓가에 와 또렷하게 새겨졌다. 란지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자 조슈아가 다시 말을 걸어온다.
“네 얼굴 맘에 든다고.”
방금 전보다 훨씬 큰 목소리였다. 그러자,
“알아.”
나긋나긋한 음성이 저편에서 넘어온다. 후우-. 조슈아는 길게 숨을 빼었다.
건너편의 란지에는 긴 손가락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눈을 깜빡였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슈아는 거친 숨을 고르면서 그저 그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의 심정과도 비슷했다.
조금 침묵이 길어져 조바심이 난다 싶을 때, 그가 몸을 일으키는지 침대 매트리스가 작게 출렁였다.
“…동기가 필요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채 고개만 이쪽으로 돌아보는 조슈아는 커다란 물음표를 떠안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란지에는 내리 곱게 눈을 깔고 하얀 침대시트에 잡힌 주름을 매만졌다. 고상한 손장난을 하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꽤나 인상 깊게 나를 훑어봤던 건 사실이잖아. 기분 나쁘진 않았어. 당신은 속된 부류들하고 다르다는 걸 내가 구분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하지만 경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신의 시선이 특별했던 것도 사실이야.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곁에 있어야할 동기를 부여해봐. 납득할 만한 것이라면 나는 그 동기에 따르겠어.”
방금 격한 운동을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그는 이 시간이면 잠이 드는 건지, 졸린 듯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벼서 억지로 뜬다. 하품하는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나른함이 참으로 요염했다. 그 모습에 홀린 양 조슈아는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렸다.
“…옆에 두고 싶으니까.”
“하아…?”
란지에의 눈이 번쩍 뜨인다. 잠이 달아났나?
언제 어디서부터였는지 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기분이 들었던 조슈아는 그의 놀란 표정이 만족스러워 시원스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오해하든 상관없지만 그것밖에 떠오르는 말이 없네. 그냥 너를 옆에 두고 싶어.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 너에게는 그러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어. 너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널 옆에 두고 싶다고 생각할 거야. 그건 네가 말하는 속된 부류일수도 있고, 좀더 순수한 뜻을 가진 자일수도 있겠지.”
“스스로는 후자라는 거야? 무슨 근거로?”
그러자 조슈아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우아하게 네 발로 기어 곁으로 다가오더니 검지로 란지에의 미간을 콕콕 찔렀다.
“그래, 솔직하게 네 얼굴도 포함해서. 너도 거울을 본 적이 있다면 네 얼굴을 부정하진 못하겠지? 하지만, 난 그것보다 더 굉장한 걸 느꼈어.”
거리가 무척이나 가까웠지만 피하지 않는다. 더 말해보라는 듯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동작은 정말 인형 같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조슈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영혼. 네 숭고한 영혼이지. 너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네 안의 힘, 난 조금 전에 그것을 엿보았어.”
한번 정신을 차리자 달변이 술술 터져 나온다. 스스로가 말하고도 훌륭한 지 조슈아는 눈썹을 슥 올렸다 내렸다. 란지에는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그의 능란한 말솜씨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공작의 곱디고운 손가락이 올라왔다. 땀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천천히 턱 선을 주욱 훑고 내려간다. 결국엔 입술에 머물렀다.
“너에게는 궁금한 게 잔뜩 있어. 네가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가 알아갈 거야.”
그래도 상대방은 가만히 있었다. 입술 주변을 맴도는 손가락이 간지러울 법도 한데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너는 아무리 알고 알아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평생 알아가도 널 모르겠지. 그런 게 날 들뜨게 해.”
실은, 란지에 로젠크란츠도 보고 있었다.
눈앞의 귀공자를. 당차고, 신비롭고, 고귀한 조슈아 폰 아르님.
아까는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지만, 정말 그에게 거울을 가져다 보여주고 싶었다. 란지에는 그가 왜 자꾸만 자신의 외모를 칭찬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외모는, 미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란지에조차도 인정할만큼 출중한 것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조슈아 폰 아르님. 또는 데모닉 조슈아.
그는 천정(天定)의 미(美)를 뽐내고 있는 데모닉을 앞에 두고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너의 진짜고, 어디까지가 너의 가짜인가….
나는 어디까지의 너를 너라고 믿으면 되지?
‘옆에 두고 싶다라…. 신물이 나도록 들어본 말이지만. 이렇게 묘하게 들리긴 처음이군.’
한없이 무채색에 가까운 그의 눈동자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안의 자신의 모습은 용케도 제 색을 갖춰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묘하게 기분이 우쭐해진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그는 몰랐다.
단지 그는,
‘하지만 나를 알려고 하면 곤란해. 알면 알수록 상처만 남을 잔혹한 동화밖에 없어. 그것은 지나간 과거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다시 되풀이할 미래일지도 모르고.’
그런 충고를 차마 꺼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둔 채 초조해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릴 테니 내 옆에서 자.”
조슈아의 손가락이 애달픈 곡선을 그리며 떠나간다. 그는 찌뿌드드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며 씻으러 가야겠다고 일어섰다. 여벌의 잠옷을 꺼내 들고 세면실로 향하는 조슈아에게, 침대에 남아있는 소년의 목소리가 닿았다.
“그쪽에게도 그런 힘이 있는 것 같군.”
조슈아가 돌아보았다. 침대 위에 남겨둔 소년은 참으로 희한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엇에 체념하고 있는 걸까, 어디서 자주 보았던 보석을 닮은 눈동자가 혼란의 빛을 띄우면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따르고 싶게끔 만드는 힘. 그건 힘과 돈으로 남을 억누르고 짓밟는 흉포한 지배자와는 달라. 실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구나.”
그는 한 박자 쉬고, 특유의 가냘프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천천히 아래로 떨어뜨렸다.
“조슈아 폰 아르님. 진심으로 존경해.”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엔 투명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조슈아의 눈에는 쭉 뻗은 콧대와 긴 속눈썹밖에 보이지 않았겠지만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곧 조슈아에게도 그와 똑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한없이 투명하고 투명한-. 그것은 어둠 속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바다 밑바닥까지 투영할 것처럼 환하고 진실 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동자에 심해는 없었다.
심해는 그 곳에 더 이상 없었다.
* * *
-창을 가린 커튼을 두드리는 어슴푸레한 달빛.
방을 밝히고 있던 인공적인 빛이 사라지고 나서야 아까부터 거기에 있었던 달의 존재를 깨우친다.
바깥의 시린 풍경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조슈아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말없이 침대에서 내려가 커튼을 활짝 걷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건네준 베개를 품에 안은 채 눈썹에 내려앉는 수줍은 달빛을 한껏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떴더니 앞에 그림자가 서있었다. 조슈아. 그의 잿빛 머리카락은 달빛 아래선 너무나 훌륭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히 달의 요정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그런 생각이 란지에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그 요정의 얼굴이 내려왔다가 금방 사라졌다.
정말 한 순간이라,
지금 이게 입맞춤인지 뭔지 기억에도 없다.
그냥 달빛에 취해서 본 환상이라 넘겨짚었다. 그게 편했다.
* * *
천장을 바라보고 똑바로 누워 이불을 끌어당긴 란지에는 심심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씻을 때만 해도 그냥 이대로 욕조에서 잠들어 버릴까 싶을 정도로 졸렸는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 다시 또 정신이 또렷해진다. 원인분석을 해보면 금방 기습당했던 짧고도 짧은 환상 속의 입맞춤이겠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오늘은 꽤 일찍 잠자리에 든 셈이다.
그는 언제나 이 시간이면 읽었던 책 중 흥미로웠던 것을 꺼내어 몇 번이고 복습하거나 내일 배울 교과목들을 또다시 훑어보았다. 그러다 지금이 도대체 몇 시인지 눈앞에 있는 것이 무슨 책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졸릴 때에야 책상에 고꾸라지다시피 얼굴을 처박고 비로소 잠들어버린다. 그를 깨우러 달려왔던 루시안이 죽은 줄 알았다며 난리를 피운 적도, 그 소란을 듣고 달려온 보리스가 정말 죽은 줄 알고 붙들고 뺨을 친 적도, 후려맞고 정신을 차렸더니 머리맡에서 막시민이 그렇게 자면 입 돌아간다며 걱정스레 타일렀던 적도 있다.
‘그러고 보니 침대에서 이불 덮고 자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가.’
담요의 포근함도 잊어가고 있던 그에게 침대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고 안락해서 입가에 절로 포물선이 그려진다. 아아, 오늘 너무 웃는다. 그런 생각에 조금 자제를 하려 얼굴을 스스로 정돈하는데,
“자?”
옆에 누운 상대의 목소리가 그 고요함을 죄 흔들어 놓았다. 란지에는 눈을 감은 채 일부러 대꾸하지 않았다.
“깨어있지?”
“……그래.”
이번에는 대답을 했다. 그러자 큭큭 웃는 소리가 넘어온다. 낮에 들으면 그냥 장난으로 웃는 것이려니 하겠는데 컴컴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니 제법 음산하게 느껴졌다. 그가 베개를 조금 당겨서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알고 있었지만 란지에는 가만히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뭐하러?”
냉담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조슈아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내가 들려주고 싶으니까.”
그야말로 조슈아다운 이유였기에 란지에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눈을 감았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의사였다. 잠시 후 란지에의 이마에 그림자가 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공작이 아이를 재우는 엄마인 마냥 누워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흘러내리면 쓸어 넘기고, 다시 흘러내리면 다시 쓸어 넘기고를 끝없이 반복하였다.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약속 따위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가 걸어둔 달의 마법이 덜 풀렸는가보다.
창 밖의 밤의 주인보다도 시리게 빛나는 푸른 장미의 꽃잎들을 상냥하게 어루만지면서 그는, 조슈아 폰 아르님은 달빛과 별빛을 반주삼아 노래하듯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허공을 바라본 눈동자를 닫으면서 그의 성대가 울렸다.
“아주 멀고 먼 곳에….”
아마 필멸의 땅보다 훨씬 바깥에 있는 곳 일거야.
지도에도 없는 구석진 곳에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침침한 광야(狂夜)의 땅이 있다고 해. 물론 실제로 그 땅을 밟아본 인간은 아무도 없어.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이니까. 그 땅에는 지옥 같은 아귀다툼의 시간 속에서 간신히 연명해온 자가 있었어. 인간이 아니었기에 인간은 그 자를 ‘악마’라 불렀지. 악마는 서로 물고 뜯고 죽이기만 하는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지긋지긋해서 미칠 지경이었어.
그러다 우연히 인간들이 사는 땅을 엿보았어. 그 곳은 자신이 사는 곳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었지. 새들이 지저귀고, 녹음이 우거지고, 인간들은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거나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고, 서로 돕고 어루만져주고, 너무나도 평화로웠어. 그 안에 사는 인간들은 누구나 행복해 보였어. 악마는 그들이 너무나 부러워서,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볼품없어서, 그들이 사는 땅으로 도망쳐왔어.
그리고, 그토록 사랑스러운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지. 인간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달려들어 소원을 빌었어. 어떤 이는 권력을, 어떤 이는 재력을, 어떤 이는 사랑을, 어떤 이는 미모를 원하였지. 악마는 모두 들어주었어. 그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으니까. 악마의 눈에 인간들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으니까. 악마는 미처 보지 못한 거야.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이면을.
인간이야말로 이 땅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도 <갈구(渴求)할 줄 아는 존재>인데.
그러던 어느 날,
악마는 자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들이 어떻게 지낼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살펴보았어.
웬걸, 온 나라가 시뻘건 화염에 뒤덮여있는 거야. 곳곳에서 힘없는 자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찢어 놓았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재력을 가진 자들이, 사랑을 가진 자들이, 미모를 가진 자들이.
더욱 더 높은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더욱 더 많은 재력을 가지기 위해서,
더욱 더 깊은 사랑을 가지기 위해서,
오로지 혼자만 아름답기 위해서.
서로를 헐뜯고 죽이고 싸우는 거야. 그 광경은 그가 그토록 싫어 도망쳤던 광야와 다를 바가 없었어.
그래서 악마는 이토록 추악하게 변해버린 인간이 싫어진 거야. 한때 너무나도 동경하고 사랑했던 인간들이었기에, 그 분노는 더욱 컸어. 기어코 악마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마음먹었어. 어떻게 해야 저 추악한 것들을 멋지게 곯려줄까- 궁리를 한 끝에….
- 그들에게 아이를 내려주었지.
“좋다! 그렇게 너희들이 갈망한다면 너희들의 소망을 전부 가진 아이를 내려줄테니 그 녀석을 우러러 ‘데모닉’이라 찬양하라!”
저절로 고개가 탁 돌아가면서 숨이 막혔다. 그리고 머리털이 쭈뼛쭈뼛 선다.
란지에는 정말 옆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정말로 존재하는 미쳐버린 밤의 세계에서 ‘악마’라는 자가 살아 돌아온 것은 아닌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한에 란지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실로 실감나는 연기다. 그는 어느새 조슈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데,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
악마가 내려주고 간 그 아이는 실로 악마적이었지.
인간의 배에 깃들어 인간에게서 태어나 인간의 손에 길러졌지만 그것은 완벽한 악마였어.
못하는 게 없었지. 뭐든 할 줄 알았어.
그냥 할 줄 알았던 게 아니야.
무엇이든 훌륭하게, 완벽하게 해낼 줄 알고 있었어.
게다가 기억력은 어찌나 좋은지 한번 본 것, 들은 것, 말한 것, 알게 된 것은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지.
인간들이 우러러 보는 공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나, 빼어난 얼굴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데모닉.
권력과 재력, 그리고 미모까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지만, 그에게도 딱 하나 부족한 게 있었어.
“그게 뭐라고 생각해?”
조슈아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몸을 아예 이쪽으로 돌린 채 넋 놓고 멍하게 있던 란지에는 오랜 시간 최면술에 걸려있다 금방 깬 것처럼 어, 어, 하고 말을 더듬었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조슈아가 가볍게 넘겨주는데 란지에는 창피해져서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후후-하고 애틋한 웃음소리가 그의 콧등을 간질인다.
“사랑이야. 애석하게도, 그토록 완벽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어.”
그리곤 밤하늘로 시선을 던진다. 별자리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수한 별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세어 보는 듯, 그의 눈동자에 잔물결이 일었다.
“물론 그의 부모나 형제, 친척들은 그를 끔찍이 사랑했지. 하지만 그 중에도 그 아이를 너무 싫어한 나머지 죽어버리라고 저주했던 자도 있었어.”
알만한 이야기다. 아니,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다. 란지에는 목구멍으로 쓴 물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저주받을 데모닉….”
칼날을 벼려놓은 듯한 섬뜩한 표현이 조슈아의 입술을 핥고 지나갔다. 그는 그대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그 표정은 보는 사람의 심장마저도 파먹어내는 듯한 아픔을 가득 떠안고 있었다.
“그게 그의 이름이야.”
저주받을 데모닉.
천재성을 타고난 아이였지만 그가 가는 곳엔 언제나 저 빌어먹을 호칭이 뒤따랐어.
하지만 그 아이는 그 호칭이 그리 싫지는 않았어. 그는 알고 있었던 거야.
자신이 그저 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악마는,
그들이 그토록 끝없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서로의 피를 손에 묻힌다면-
그런 희망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그런 분쟁조차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으로 그들을 제압하려 했던 거야. 하늘보다 더한 천재성을 이용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끝없이 질투하게 하고, 끝없이 시기하게 하고, 끝없이 절망하게 하는 것. 그것이 ‘데모닉’의 존재 의의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악마는 애초에 그를 만들 때부터 그에게서 사랑을 앗아갔어. 아무도 사랑하지 말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말지어다. 너는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며, 너는 세상을 어지럽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그런 미친 발상 아래에 태어난 그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겠어?
미움 받는 것은 그야말로 숙명이었어.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증오의 화살을 받았지. 하지만 그 아이는 그 숙명을 기쁘게 받아들였어. 아니, 정말은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자신을 속였던 걸지도 모르지.
잔인한 숙명에 몸을 맡긴 채 덧없이 흘러가던 어느 날-.
그가, 너무나도 천재적인 그가, 체스판을 뒤집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죽이고 인형처럼 수동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누이는 죽었어.”
그의 누이는 춤을 잘 추는 아름다운 소녀였는데,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그를 데모닉으로 대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었어. 사실 누이는 데모닉을 이해할 정도로 똑똑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말이야. 어쨌든 누이가 그를 끔찍이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야. 헌데 그는 누이가 곁에 있을 때는 몰랐던 거야. 얼마나 사랑받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누이가 죽고서야 그는 자신이 데모닉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와 동시에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고 있는 바로 자기 자신.
사랑, 그런 건 없었을 텐데. 그런데 분명히 있었던 거야.
이상하지? 누가 그에게 사랑이 없다고 했을까?
악마? 어쩌면 데모닉을 창조한 ‘악마’조차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그 어린 아이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을지도 모르지.
누이가 영영 떠나버린 날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그때부터 다른 삶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어. 거기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 거지.
노래하고 춤추면서-.
운명에 반항하는 큰 날개짓이었어. 그때부턴 아무도 그를 데모닉이라 부르지 않았어….
-그는 아주 행복할 거야.
이야기가 끝났다.
“이 정도로 해둘까? 그 다음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시시한 것뿐이야.”
언제 일어났을까, 누워있던 란지에는 어느새 그와 눈높이를 마주하고 있었다. 밤빛에 억눌려 보랏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 심한 동요가 떠오른다. 그건 갈채를 보내고 싶어 안달하는 눈빛이 아니라 이 다음 그에게 닥쳐올 파도에 부딪쳐 볼지 말지를 택하지 못해 불안에 떠는 눈이다. 그의 눈에는 보인다. 하얗게 빛나는 소공작의 안에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팽창하는 것이, 누구를 향하여 물빛을 번뜩이는지도 훤히 보인다. 아교로 붙인 듯 꼼짝도 않던 입술이 열렸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뭐야….”
“물론 반쯤은 허풍인 이야기지만 그냥 들어달라고. 적어도 네가….”
거기까지 말하고는 조슈아는 란지에를 거세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무방비하게 정신을 놓고 있다 조슈아의 품에 갇혀버린 란지에는 지금 이 상황이 도대체 뭔가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사고를 더듬어 보는데, 조슈아는 이미 그를 충분히 가슴에 품고도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아 제 안에 파묻으면서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갖다대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터뜨렸다.
“적어도 네가 죽이려고 했던 자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으면 해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란지에에게 닿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죽은 듯 미동이 없던 그가 갑자기 크게 몸부림치며 날뛰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아 벙긋거리기만 하는 입술은 아마도 ‘이거 놔!’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 같다. 허나 조슈아는 그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주 간신히 쥐어짜내어 “이거 놔!”라고 튀어나온 란지에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음에 가깝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 이대로 터져버릴 것 같다.
그토록 열심히 세웠던 그의 요새는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서 누군가 조금만 훅 하고 입김을 불어넣기만 해도 곧바로 금이 가버리는 것이었다. 란지에는 몰랐다. 그의 요새는 오래전에 금이 가 있었는데….
그와 처음 강의실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 날부터 그 작은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걸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님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걸까….
“이거 놓으라고 했잖아!”
완력차가 있던 탓에 조슈아를 뒤집어놓을 수 없자 분해서 죽을 것만 같은지 이빨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짓이긴다.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체력으로 제 품안에서 발작을 일으키듯이 날뛰는 소년을 꼭 끌어안고 버티느라 손을 깍지를 끼고 이를 꽉 악문 조슈아는 상대가 제발 놓으라며 사정사정을 하는데도 그 의지를 꺾을 줄 몰랐다.
“왜 그렇게 너를 괴롭혀!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조슈아 폰 아르님은 이미 아주 어릴 적에 한번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적이 있어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그 악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살의(殺意). 어떤 명분이 있든 간에 그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려고 하는 자와 마주 걸을 수는 없다. 조슈아는 그들의 희생양이 될 생각도 없었고 그들을 용서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온 힘을 다해 란지에를 쓰러뜨렸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조슈아는 그가 자신의 머리에 씌우려한 올가미가 얼마나 큰지를 눈치 챘던 것이다. 그 올가미가 정말 아르님 소공작의 것일까? 조슈아 폰 아르님만을 졸라매기 위한 것일까? 그의 머리를 집어넣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머리까지 집어넣으려고 했던 건 아니고?
아무 죄 없는 나를 네 안락한 이상을 위해 희생시키려 했으면서 정작 네가 죽을 각오를 해? 그래서 죽지 못하고 살아남으면 평생 그 죄를 지우기 않기 위해 그 곧은 이마에 새겨놓으려고? 웃기지 마! 그렇다면 나도 절대로 죽지 않겠어!
“아직도 모르겠어? 난 살아있어! 넌 실패했다고! 끝난 일이야! 난 앞으로도 살 거야! 너보다 더 오래 살 거야!”
무자비한 악당이 되기엔 네 날개는 너무 커. 도저히 접히질 않지.
그래서 넌 아예 날개를 꺾어버리는 걸 택한 거야?
나중에 하늘이 열리거든 그때 넌 남들이 나는 모습만 바라볼 거야? 그게 행복이야?
“그러니까, 이 멍청아! 당당히 네 날개를 추스르라고! 세상에는 너보다 훨씬 악랄한 인간들이 널리고 깔렸으니까! 난 그 사람들을 더 미워할 거야! 너 따위에 노여워하는 건 한없이 시간낭비고 체력낭비라 가치를 두지도 않겠단 말이야!”
체중을 실어 란지에의 양 어깨를 꾹 누르고 그 위에 올라선 조슈아는 결심을 굳혔다.
<그래! 네가 스스로 장미의 가시만을 골라 밟겠다면 난 살아서 그 장미의 가시를 모조리 뜯어놓겠어!>
조슈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가는 손목에 푸르스름한 핏줄까지 돋우며 자신을 밀어내는 그에게 억지로 입술을 떨어뜨린다. 입술이 채 다가오기도 전에 그가 격한 반항을 보이는 통에 콧등이며 턱이며 서로 마찰을 빚는데, 그래도 조슈아는 악착같이 목적지를 찾아간다.
입술이 마주 닿자 눈을 부릅뜨는 걸 조슈아도 보았지만 모른 척, 아까 란지에가 스스로 죄 뜯어놓은 입술을 자신의 열로 감쌌다.
밑에 깔려 조슈아의 무자비한 입맞춤을 받아내던 란지에는 톡-하고 뭔가 왼뺨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지?
곧, 똑같은 것이 톡-톡- 뺨의 살갗을 계속 때린다. 이상하다. 창문은 닫혀있는데, 어디서 비가 내리는 걸까.
황급히 몸을 일으킨 조슈아가 얼른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소리로 ‘젠장….’하고 욕지기를 했다. 무엇을 말하는 눈물이었을까. 그 의미를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자만일까?
“난 상관없어.”
조슈아가 말한다.
방금 전 그 눈물은…. 서둘러 수습한 덕에 그가 방금 무슨 실수를 했는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기에 란지에도 스스럼없이 기억의 저편으로 흘려보낸다. 동시에 그를 밀어내려 악착같이 반항하던 손도 진이 빠져 맥없이 아래로 추락한다. 이렇게나 심장이 아픈데도, 머릿속은 너무나도 차갑게 식어있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 체념과도 비슷한, 하지만 체념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비치는데, 조슈아는 이미 다 알았다는 데모닉의 눈빛으로 어루만져주었다.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상관없어.”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춘다. 이번에는, 그도 고분고분 입술을 열어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살아있잖아.”
쪽,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그 안에서 힘차게 팔딱거리는 것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지.”
지금 그것을 증명해보이겠다는 듯 조슈아는 아예 얼굴을 파묻어 입술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때부터 란지에는 정신을 놓았다. 온 몸의 신경세포는 전부 죽어버리고 오로지 누군가 정성껏 탐하고 있는 입술만 살아있었다. 빨고, 비비고, 핥고, 그런 감각만 눈을 뜬다. 시간이 멈춰버린 머릿속에는 그저 ‘아아…. 데모닉이 나에게 키스하는 구나.’라는 상황만 간추리고 있었다. 그런데, 키스가 뭐였더라. 사전에서 본 적 있는 단어였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빙빙 도는 머릿속만 헤질러놓으면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다가,
“…아, 안돼. 너무 교활한 수법이야.”
얼른 밀어낸다. 정도를 모르고 침범하는 혀에 잃어버렸던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란지에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가렸다. 조슈아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괜찮아. 넌 또 한번 나의 마법에 걸렸다고 생각하면 돼.”
하고 속삭이는 얼굴이 너무나도 다정하게 웃고 있다. 안돼? 안돼? 애교를 부리며 허락을 구하는 그 모습은 실로 악마적이라고 란지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절할 명분을 못 찾겠어. 아니, 내가 왜 거절해야하는지도 이젠 모르겠어. 다 모르겠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데모닉, 이게 진짜 네 능력이야.
“그게 아니라 난….”
그래도 뭐든 지껄이고 보자는 식으로 더듬더듬 말을 잇는데 그의 손가락이 쉿 하듯 다가와 막는다. 그리고 이어서 뺨으로 떨어지는 부드러움.
“생각하지 마.”
악마의 속삭임. 영혼을 꿰일 듯한 달콤한 유혹.
“아무것도.”
괜찮다. 어차피 타개할 방법 따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떠올릴 수도 없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이 생긴대도 지금은 이대로 편하고 싶다.
그냥, 이대로, 편하게, 전부, 따르고 싶다.
…그렇게 마음을 달래면서 눈앞의 아름다운 악마에게 매달린다. 자, 나에게 키스를 퍼부어줘.
구름 뒤로 숨어버리는 달의 신호에 맞추어 서로의 호의를 확인하는 시간이 막을 내렸다.
막이 내리기 전에 이미 등을 돌리고 누운 두 사람은 미동조차 없었다. 입술이 맞닿았던 짜릿한 감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은 몽롱하고 좀 전에 그랬었다는 기억조차 없다. 혹시 전부 무대 위에서 꾼 꿈이었나? 그래서인지 더 이상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재밌는 거 하나 알려줄까?”
적막을 깨고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란지에가 자동적으로 돌아누웠다.
“……응.”
그가 말하는 ‘재밌는 것’은 듣는 사람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하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것을 직접 겪은 란지에 역시 순수하게 재미를 바라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아니다. 그가 또 이번엔 어떤 섬뜩한 화제를 드리울지….
“이건 비밀인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란지에는 이제 그에게서 무슨 소릴 듣는다 한들 놀랍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가 나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좋아한다. 그 이상 놀라운 사실이 또 있을까….
밤하늘을 뒤덮었던 구름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다.
“네 방에 젤리 갖다 놓은 거….”
“……!”
란지에가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역광으로 들어오는 가운데 그림자가 진 조슈아의 얼굴이 너무나 발랄하게 웃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나야.”
아연실색도 그런 아연실색이 없었다.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셔 바깥에 떠 있는 달보다 더 하얗게 떠버린 란지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아니라, ‘역시’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슈아는 짓궂게 웃으면서 그에게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고는 곧바로 상황진술까지 술술 부는 것이었다.
“원래는 막군이 가져가서 안 내놓은 넥타이를 되찾으려고 갔던 건데, 테이블에 젤리가 놓여있더라고. 가까이서 보니까 딱 알겠더라, 그게 뭔지. 루시안이 만들어 보겠다고 나한테 엄청 떠들어댔으니까. 근데 가만히 지켜보니까 서서히 부풀어 오르잖아? 난 워낙 뛰어난 천재라서 순간 딱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거야. 마침 주변엔 아무도 없고. 문도 열려있고. 아주 그냥 저질러 버리라고 환경이 나를 떠밀던데?”
“너, 너….”
처음이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가 조슈아 폰 아르님을 ‘너’라고 지칭한 것은. 그런 신선함을 만끽하는 것이 조슈아는 너무나 좋았다. 말문이 막혀서 계속 너, 너, 하는 란지에에게 조슈아는 양손바닥을 활짝 폈다.
“아 물론, 설마 불로 수습해야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건 내 탓 아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란지에는 순간 확 열이 받았지만 조슈아가 너무나도 온화하게 웃고 있었기에 맥이 탁 풀려서 그의 곁에 도로 드러누웠다. 그럼 그렇지. 이 모든 것이 우연일 리가 없지. 완벽하게 당해버렸군.
“아냐, 됐어. 왠지 그럴 것 같았어.”
그러자 조슈아가 이죽거렸다.
“거짓말.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잖아.”
란지에는 당당한 범죄자를 곱게 흘겨보더니 그저 한숨을 흩뿌린다.
“네가 그랬다고 하니 그냥 무조건 납득이 된다. 이것도 너의 능력인가 보지, 조슈아.”
“글쎄…. 난 네가 더 대단해 보인다. 적어도 난 빈대를 잡기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무식한 짓은 안하거든.”
“그쪽이 뿌린 빈대잖아.”
“만든 건 루시안이지. 걘 아마 전생에 내 친형제였을지도 몰라. 내가 좋아하는 짓만 골라가면서 하거든.”
잠시 후, 두 사람은 마주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다 동시에 눈을 뜨고, 서로의 얼굴을 끌어당겨서 입술을 맞댄다. 마치 그렇게 할 거라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동작이었다.
‘아, 이러다 버릇 되겠어….’
말로야 걱정이지, 그러고는 몇 번 더 입을 맞추다가 진짜 안 되겠는지 란지에가 먼저 손을 들었다.
“성냥에 불을 붙일 때부터 마음속에서 떨쳐버린 일이라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고 싶진 않아. 하지만, 정말 놀랍군. 이유라도 들어볼까? 물어볼 필요도 없을 거 같지만 일단 확인은 해두고 싶어.”
그 목소리는 평소의 냉랭한 기품이 느껴지는 그것이었다. 그러자 조슈아도 평소의 자신을 되찾고 여유를 부렸다.
“친해지고 싶었거든. 말했잖아. 널 옆에 두고 싶었다고. 너도 납득한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납득할거라 생각해?”
“어라, 마음속에서 떨쳐버렸다며? 뭐 버리면 안 되는 물건이라도 있었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딱 하나 있긴 하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정성스레 준비해서 보내주었던….
“…됐어.”
“있었다면 나한테 주먹을 날리면 돼.”
그 말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꼭 쥐었던 란지에는 조슈아를 쳐다보더니 곧바로 주먹을 풀었다.
“안 때릴 거야?”
“때릴 수 있을 리가….”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는 거야, 란지에는 제 이마를 짚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막군이라면 상대가 나라도 주먹으로 코를 강타한 다음에 낯짝에 침을 뱉고 발차기를 날릴 거야. 그리고는 ‘썩은 시금치를 먹고 뒈져버린 닭뼈 같은 자식’이라고 욕까지 할 걸? 아, 그리고 물건은 전부 5배로 보상하라고,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쳐서 7배로. 후불도 받겠지만 할부는 안 된다고 하겠지.”
조슈아는 베개 위에서 반짝이는 하늘빛 머리카락 한 올을 주워 양손으로 팽팽하게 당기는 장난을 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란지에한텐 그 말이 더 놀라웠다.
“…너 진짜 막돼먹은 친구를 사귀는 구나.”
조슈아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응. 그래서 이번엔 좀 제대로 돼먹은 친구를 사귀어 보려고.”
입술을 모아서 ‘너’라는 모양을 만든다. 그러면서 가지고 놀던 머리카락을 입에 넣으려고 하자 란지에가 재빨리 빼앗았다. 기가 막혀서 ‘뭐하는 거야?’라고 묻자 배시시 웃으면서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정말 예측불허의 괴짜라고 란지에는 생각했다.
아얏. 한술 더 떠서 이번엔 머리카락을 툭 뽑았다. 왜 이래? 란지에가 노려보자 조슈아는 대꾸도 없이 얄밉게 눈동자를 굴리면서 저쪽으로 돌아누웠다. 란지에는 괜히 분한 기분이 들어서 ‘그거 이리 내.’하고 달려들었다. 나이 열일곱의 소년들이 머리카락 한 올에 사활을 걸고 엎치락뒤치락하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먹지 마.”
“배탈 나도 내가 배탈 나지, 왜 상관이야?”
“누가 네가 배탈 나는 걸 신경 쓴대? 내거잖아. 이리 내.”
“지금 쩨쩨하게 머리카락가지고 소유권 주장하는 거야? 그렇게 많으면서?”
“너도 많이 있잖아!”
열일곱은커녕 일곱 살 수준의 유치한 말싸움을 하면서 서로 부둥켜안고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이 모습을, 학원 친구들이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너무 놀란 나머지 입으로 허파가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이미 손에 들려있던 머리카락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한데 계속 내놓아라, 싫다, 입씨름을 하면서 우아한 백조들의 난투극을 연출하던 그들은 결국 구르고 구르고, 또 굴러서 침대 아래로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쿵- 하고.
“쓰읍, 아야야….”
신음소리의 주인공은 란지에다. 떨어지면서 조슈아의 쿠션이 되어버린 란지에는 위에 있는 놈을 냅다 밀쳐버리고 일어나 눈썹을 찌푸리며 뒤통수를 문질렀다. 융단 위로 떨어졌는데도 충격이 상당하다. 이 망할 자식-! 도저히 평소의 얌전한 그였다면 절대 할리가 없는, 할 수도 없는 거친 말을 툭 내뱉으면서 가볍게 발길질까지 했다. 조슈아는 잽싸게 날아오는 발꿈치를 피하면서 말했다.
“너하고는 정말 친해지고 싶었어. 난 네가 너무 맘에 들어. 그런 유치한 장난까지 쳐가면서 옆에 두고 싶었을 정도로.”
“넌 지금도 유치해. 너 때문에 나까지 이상해지고 있잖아. 날 알고 있는 친구가 지금 나를 봤다면 엉엉 울면서 날 정신병원으로 끌고 갔을 거야.”
“나한테 끌리고 있다는 증거야. 아주 좋은 현상이지.”
조슈아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검지를 맵시 있게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일어나서 창 밖에 널려있는 수천 수억의 구경꾼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맞이하듯 두 팔을 벌렸다. 온 세상 별들이 그의 가슴으로 쏟아진다.
그는,
“부디 날 피하지 말아줘.”
-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란지에를 바라본다.
“난 네가 한번이라도 내 목에 칼을 들이대려 했던 것 때문에 날 피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확실히 알려주고 싶었어.”
그는 잠깐사이에 하늘에서 별이란 별은 모조리 따왔나 보다. 회색 빛깔 눈동자, 아니 지금은 더 이상 그 색깔도 아니었다. 시리도록 푸른빛으로 감도는 그의 눈동자에 이름 없는 별자리가 무수히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짓궂은 무대를 꾸며본 건데, 그렇네. 운명은 지독하리만치 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거든. 대본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실(失)만 있는 건 아니잖아?”
새하얗게 나부끼는 달빛 속에서 조슈아가 손을 내밀었다. 입술이 살짝 치켜 올라간다. 웃는다. 그것은 신호다. 어서, 이 손을 잡으라고. 어서.
“난 널 더욱 좋아하게 되었어. 그리고 넌 나에게 존경한다 말했지.”
멍한 눈으로 내밀어진 손을 올려다보는 란지에는 언제부턴가 그의 목소리는 전부 주문이 되어 다가온다는 걸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열린 귀로 듣고 있는데 그 내용은 들어오지도 않고 오로지 저 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할 리가 없지 않은가. 데모닉 조슈아, 이것도 너의 힘인가? 아니, 이건 조슈아 폰 아르님이로군.
겁난다.
그 손을 잡았다간,
꽃잎을 보호하고 있는 마지막 가시마저도 전부 녹아버릴 거 같아서.
이런, 이런. 그는 이런 식으로 내게서 방어책들을 모조리 앗아갈 셈인가.
란지에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조슈아 폰 아르님.”
하고 앙칼지게 쏘아붙이고는 그의 악질적인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손을 붙잡고 부스스 몸을 일으켜 침대로 올라간다.
조슈아는 굉장히 기묘한-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따라 침대로 올라가 구석으로 날아간 베개를 수습했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제자리에 없는 베개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란지에는 조슈아가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던지지 마.’라고 따끔하게 말했다.
조슈아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아주 품위 있는 동작으로 베개를 그의 얼굴로 날렸다.
“조슈아.”
베개를 베고 바로 누워 이제는 좀 자는 가 싶더니, 이번에 입을 연 것은 란지에였다.
“날….”
“용서하지 말라고?”
조슈아가 얼른 말을 받았다.
“너 머리가 나쁘구나? 지금까지 뭘 들었어? 난 네가 밉지 않다고 했잖아.”
하-, 그는 코웃음을 치며 약간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
“널 미워하는데 정신을 쏟는 일은 완벽한 시간낭비라고. 왜냐하면 널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들이 우리 집안에 벌써 수두룩하거든. 나 하나쯤 널 용서한다고 해서 그들의 분노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앞날까지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넌 아마 그들이 땅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그들의 악에 받친 저주를 받아야 할 걸.”
소름끼치는 소리를 태연히 내뱉으면서 조슈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단언했다.
“난 듬뿍 사랑받고 있거든.”
할말을 잃고 방황하는 란지에의 이마에 조슈아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살짝 젖은 쪽 소리가 나면서 그의 볼에 수줍은 꽃봉오리가 진 것을 확인한 조슈아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으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홍련의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일어선다. 닫혀있던 감각들이 하나 둘씩 열리면서 미치도록 아름다운 빛깔을 발하는 그 안광에 누군가의 미소가 담겨졌다.
“행여 네가 다시 날 찌르는 날이 와도 상관없어. 그때마다 살아남을 거야. 그리고 그때마다 널 용서할 거야. 그러니까 넌,”
조슈아가 웃는다. 너무나도 온화하게…. 그에게서도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눈앞의 단 한 사람에게 활짝 열린 자신의 꽃을 전부 바쳤다.
“널 용서하는 날 용서해.”
그랬더니,
란지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하고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모른다고 했던가….
모든 것이 진짜다. 확신할 수 있다. 여기 있는 그가 진짜고, 그것이 전부라고.
조슈아 폰 아르님.
진심으로 널 존경해.
“일단 자자. 밤이 너무 늦었어. 난 늦잠자도 상관없지만 넌 수업을 가야지.”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도대체 몇 시인지, 졸려 미칠 지경이다. 조슈아는 연달아 터져나오는 하품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그만 자자고 란지에를 토닥였다. 란지에는 그만 실소를 터뜨린다.
“사람을 이렇게나 헤집어 놓고 잘도 자라는 소리가 나오네….”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팔베개를 해주겠다잖아.”
빙긋 웃으면서 오른팔을 뻗어 이리 오라고 조슈아가 손짓한다. 갈까 말까 머릿속은 망설이고 있는데 몸이 먼저 동하여 그쪽으로 기울었다. 란지에가 기대오자 누워있던 팔이 신경초(神經草)마냥 잽싸게 움직여 그를 포획했다. 당연히 이럴 줄 알았지만…. 망연자실한 얼굴로 조슈아의 품에 안긴 란지에는 뭔가 꼬여도 확실히 꼬였다는 걸 알았지만 무슨 수로 되돌려야할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정말 멍청해진건가….
“잘 자.”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그 소리에 란지에는 다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최악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악몽을 꾸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이 곳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그의 손을 잡는 게 아니었어.
이것 봐.
보기 좋게 잡혀버렸잖아. 난 이제 두 번 다시 뭍으로 올라갈 수 없을 거야.
꼴좋다.
어둠을 탐낸 벌이야-,
그대로 심해 바닥까지 가라앉아 물거품이나 되어버려, 란지에 로젠크란츠.
-하지만
악몽을 꿀 것 같다던 그의 마지막 예상마저도 틀렸던 모양이다.
얼마 후, 새근새근 어여쁜 숨소리만 맴도는 소공작의 방에는
잃었던 날개를 되찾은 듯 편안함을 드리운 채 미소 짓는 누군가와
최고의 무대를 펼친 듯 만족감을 드리운 채 미소 짓는 누군가가
닿은 어깨를 통하여 꿈을 나누고 있었다-.
* * *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검고 차디찬 공간.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들은 전부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 궁극적인 생존만을 추구하며 일그러진 모양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사랑’따윈 없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알아버리면,
모른 채 살아왔던 시간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지니까. 부끄러워서 죽고 싶을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너무 수줍어 한 나머지 사이좋게 물거품이 되어 녹아버렸나?
하지만 이젠 없다.
심해는
없다.
- 그들은피하지않고부딪치는길을택했다
* * *
늦잠자도 상관없다더니, 란지에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옆에 없었다. 씻으러 갔나-하고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던 란지에는 정면에 바로 보이는 조슈아 때문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슈아는 말끔한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책은 어제 란지에가 테이블에 놓아두고는 그대로 까맣게 잊어버린 바로 그 책들이다.
“너 진짜 시체같이 자더라? 죽은 거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이나 맥을 짚어봤어.”
란지에가 일어나자마자 고상하게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책을 탁 덮은 조슈아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무엇이 그리 재밌어 댁이 날마다 그렇게 책에 고개를 파묻고 사는 건지 그 고귀한 세계가 궁금해서 그랬다며 독서의 이유를 설명한 조슈아는 하지만 역시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덧붙였다.
란지에가 책을 읽는 조슈아를 보고 흠칫했던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읽으려고 들고 왔던 책의 존재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 둘째, 본인은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했지만 아침햇살아래 소공작의 독서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그림처럼 어울렸기 때문에.
“어제….”
더듬더듬 말을 꺼내는 란지에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의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하다. 하긴, 잤다고 해봐야 몇 시간이나 잤다고. 잠에서 덜 깨 몽롱한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떴다하는 모습이 꼭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 같았다. 눕히면 스르륵 잠들고 세우면 반짝 눈을 뜨는.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십년은 늙어버린 것 같아. 골이 지끈지끈해.”
우우-하고 신음성을 흘리며 수척해진 얼굴을 손으로 감싸는 모습에 조슈아가 하하하 웃으며 그를 놀렸다.
“거울 가져다줄까? 확인해볼래? 내가 볼 땐 아직 열일곱밖에 안된 소년인데. 그것도 아주 미소년. 하긴, 넌 십년 후가 더 기대되는 얼굴이야. 예쁘게 관리해서 잘 익어주라고-.”
란지에는 아침부터 농담할 기분이 아니라고 중얼거리면서 몸을 질질 끌고 세면실로 향했다. 이토록 격하게 수업을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처음이다. 맙소사, 하룻밤 새 소공작에게서 온갖 나쁜 건 다 옮아버렸군.
정신 좀 차리시라고 찬물을 마구 끼얹어 세면을 마치고 나온 그는 문 앞 바구니에 가지런히 놓인 교복셔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접힌 깃이며 솔기가 빳빳이 살아있는 새 것이었다. 그 아래에 교복바지도 함께 있었다.
조슈아가 말했다.
“그거 입어. 난 오늘 수업 안 갈 거야.”
“‘오늘’이 아니라 ‘오늘도’겠지.”
고맙다는 표시로 짧게 목례를 하고 셔츠를 집어든 란지에는 무던히 잠옷 단추를 끄르다가 조슈아를 흘끔 쳐다보더니 그대로 휙- 세면실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참나. 조슈아는 팔짱을 끼고 서서 세면실로 사라져버린 그의 그림자에다 대고 빽 소리를 질렀다.
“뭘 숨겨? 넌 배꼽이 두개라도 되는 거야?”
그러자 저편에서 벽을 타고 웅웅 울리는 대답이 돌아온다.
“바지가 좀 헐렁한데 더 작은 거 없어?”
-없어, 인마.
양말까지 빌려 신고 머리카락의 뻗친 부분만 빗으로 정돈한 란지에는 교복 자켓을 걸치면서 나갈 채비를 하는데 조슈아가 손짓으로 불러 세웠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죽겠는지 샐쭉 웃고있는 입모양에 괜히 불안했다.
뭔데-하고 란지에가 다가오자 조슈아는 뜸을 살짝 들이더니 네모반듯한 육면체를 내밀어준다.
“자, 이건 내가 아름다운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어제의 사죄이기도 하고.”
너무 잘 아는 물건이고 너무 소중한 물건이지만 잃어버렸던 것이 확실한 물건인지라 선뜻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확실하다.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져 감촉을 확인한 후에야 란지에는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그 나무상자를 끌어안았다.
“젤리에 젖으면 안 될 물건인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들고 왔어.”
그 말인즉슨, 이 나무상자가 들어있던 서랍까지 뒤져봤다는 말인데…. 따지기는커녕 생각하는 것조차 피곤해서 란지에는 얌전히 고맙다고 인사했다. 별 말씀을-, 조슈아는 손사래를 치며 시시덕거린다.
“코츠볼트에서 살던 시절에 막군에게 배웠던 기술이 몸에 익었나봐. 진짜 막군하곤 좀 멀어질 필요가 있겠다. 나쁜 것만 잔뜩 배워왔네. 하지만 걱정 마. 열어보지는 않았으니까. 정말이야. 물론 막군이라면 당장 열어보고 눈에 띄는 값진 것은 바로 주머니에 넣었을 테지만- 난 아냐.”
…만약 들어있는 것이 필요 없는 물건이라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겠지. 오랜 친구 되시는 조슈아 폰 아르님의 몇 가지 증언 덕에 막시민이란 남자의 다음 행동이 자연스럽게 유추된다. 막시민 리프크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란지에는 자신의 양손바닥보다 약간 더 넘치는 나무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짓는다. 뭐가 들어있나 조슈아가 고개를 빼고 들어다보자,
“하나 먹어볼래?”
하고 란지에가 조슈아에게도 하나 건네주었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만든 쿠키를.
이런 군것질거리랑은 아노마라드에서 하이아칸을 가는 거리만큼이나 떨어져있을 것 같은 녀석이 버터향이 고소하게 풍기는 쿠키를 내미니까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뚱한 얼굴로 쿠키를 받은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웬 거야?”
“글쎄. 없던 것이 생겨있네. 간밤에 요정이 만들어 넣어두고 간 건 아닐까?”
이렇게 산뜻한 농담을 하는 걸로 보아하니 농담에 맛을 들여도 너무 들인 모양이다. 조슈아는 실없는 농담에도 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피식 웃으면서 쿠키를 한입 깨물었다. 그렇군. 너도 누이가 있구나….
“참으로 상냥한 요정이네. 이렇게 맛난 과자를 구워주다니. 분명 얼굴도 예쁘겠지?”
“마음도 무척이나 예쁘지.”
멋지게 말을 받아 놀리면서 란지에도 하나 입에 집어넣었다.
“네가 끓인 차에 곁들이면 좋을 거 같아. 애정이 느껴지는 아주 부드러운 맛이야.”
조슈아는 입 속의 혀를 굴리며 진지하게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란지에가 말하길-.
“나도 너만큼이나 듬뿍 사랑받고 있거든.”
괜찮으면 더 먹어도 돼, 하면서 더 권하자 조슈아는 ‘그럼 사양 않고.’하면서 두세 개 더 집었다. 내가 너보다 많이 먹으면 요정이 화내는 거 아닐까? 란지에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을 좋아할 거야.’라고 답했다. 그러자 조슈아는 그렇다면 역시 루시안이 제일 사랑받겠다며 킥킥 웃었다.
남겨봐야 자긴 다 먹지 못할 거라고 내미는 통에 상자안의 과자를 전부 거덜 낸 조슈아는 그 맛이 진짜 맘에 들었는지 아쉬운 입맛을 쩝쩝 다시기까지 했다.
“사랑이라…. 그럼 오늘부터 나도 과자를 구워서 너에게 바쳐야 하나?”
조슈아가 장난처럼 진지하게 상담을 청하자 란지에의 입매가 예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눈매도 초승달을 눕혀놓은 것 마냥 가늘어졌다.
“과자보다는….”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밤새 이슬을 삼킨 차가운 바람이 훅- 얼굴을 훑고 들어온다. 상쾌한 아침 공기에 몸을 맡긴 채 고운 양손을 벌리면서 란지에가 이렇게 말했다.
“차를 우리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너의 그 빼어난 얼굴에 굴욕을 준 거만한 친구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줘야지.”
“맞아. 그게 좋겠다.”
조슈아도 활짝 웃으며 맞장구쳤다.
“당연히 네가 가르쳐주는 거겠지?”
“나라도 괜찮은가?”
“너라서 괜찮은 거야.”
그리고 마주보는 둘의 머리칼이 금빛으로 찬란하게 나부낀다.
…….
아마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둘은 눈앞에 그림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심장에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다고. 똑같이 뺨을 물들인 채 한 녀석은 시계로 눈길을 던지고, 다른 한 녀석은 괜히 소매 자락에 뭐 묻었는지 살핀다.
시계를 바라보던 조슈아가 이제 슬슬 수업 들으러 가시라고 란지에의 등을 떠밀려는데,
“조슈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라고 란지에가 입을 연다.
“배우는 게 학원이 우리에게 주는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 배우기만 하는 거라면 학원이 아닌 어디에서라도 할 수 있어.”
“…….”
갑작스런 화제전환, 그것도 지금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화두라서 조슈아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얼굴로 서둘러 다음을 재촉했다.
“네가 학습이외의 것에도 가치를 둔다면 학원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곳이지.”
그것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딱딱하고 지루한 소리지만, 조슈아의 구미를 당기기엔 충분했다.
“글쎄, 모르겠는데. 예를 들면 어떤?”
조슈아는 일부러 시큰둥하게 답해본다. 네가 지금 나한테 뭘 말하고 싶은 걸까? 그것이 기대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제에….
그때까지 긴 속눈썹을 뽐내듯 눈을 죽 내리깔고 소매 자락이나 지분거리던 란지에가 눈을 치뜨고 조슈아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곧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대답했다.
“나.”
라고.
조슈아는 지금 자신의 청각이 제 기능을 한건지 의심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주는 강력한 한방이 이어서 날아왔다.
“너, 날 보는 걸 좋아하잖아.”
조용하다. 너무나 조용했다.
바깥에 바람이 어떤 모양으로 춤을 추는지, 꽃들은 어떤 향기로 바람을 맞이하는지, 새들은 어떤 소리로 노래하는지, 이제껏 몰랐던 것들이 생생히 느껴진다. 심장이 어떤 리듬을 타고 울리는지도.
“하하…….”
이윽고 조슈아의 입에서 실소가 흘렀다.
조슈아는 눈앞의 요망한 인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설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 너는 설마 날 조롱하러 온 서큐버스냐? 하지만 그는 얼마 전 네냐플에 편입한 란지에 로젠크란츠임이 분명했다.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것 잡을 수 없는 큰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넘어가던 조슈아는 휘청거리는 몸을 그대로 앞으로 숙여 푸른 머리의 서큐버스를 끌어안고 침대로 엎어졌다. 그는 침대로 달려들면서 거실로 침대를 빼온 것은 정말 탁월한 판단이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을 것이다.
곧바로 조슈아가 거칠게 입을 맞춰오기 시작했다.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모습은 눈 덮인 산에서 오랫동안 굶주린 무엇 같았다. 란지에는 정신없이 입술을 놀리는 조슈아를 얌전히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서서히 달아오르는 몸을 그에게 지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작정 비벼대던 입술이 점차 벌어지기 시작해 이윽고 입술이 입술을 빨아먹는 소리만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떨어져버리면 이제 다시 못 만날 것 마냥 두 사람의 입술은 끈질기게 서로를 탐했다.
-물어본 적 있던가? 너도 날 좋아하냐고.
금방 정리했던 침대시트를 엉망으로 구기며 키스에 집중하던 조슈아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랬더니, 그도 그런 생각을 눈치 챘던 걸까. 떨어질 줄을 모르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행위 속에서 그는 용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네 마음에는 응답 못해.”
“응, 알아.”
명백한 거절인데도 조슈아는 전혀 실망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기뻐 죽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입술을 떨어뜨린다. 쪽쪽쪽- 하는 앙증맞은 소리 사이사이로 란지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약간 달아올라 가쁜 숨이 섞인 야릇한 목소리가.
“보다시피 학원에는 도망 온 것뿐이야. 잠깐의 실수로 죽다 살아났더니 여기서 얌전히 놀다 오라고 날 내쫓아버렸거든. 졸업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거야. 난 오로지 그것 때문에 살아있으니까. 그러다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하지만 난 살아서 누리는 쪽을 택할 거야.”
“응, 알아.”
어쩌면 10년 후, 아니면 더 빠른 미래에 그는 다시 자신의 목에 칼날을 들이댈지도 모른다. 또는 자신이 그의 목을 쥐고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걸 지금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어린 그들이 생각해야할 것은 안개에 가려진 내일 따위가 아니라 당장 닥쳐있는 서로의 입술이었다.
“그래도 네 인간 됨됨이에 대해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건 잘 알았어.”
그 말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히려 넘친다. 조슈아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떻게 주체하지 못해 코까지 찡해오는 걸 느꼈다.
또 그의 앞에서 창피하게 눈물을 쏟아야하나?
“맘에 들었으면 가끔씩 이렇게 놀아줘.”
울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단숨에 말하고는 조슈아는 대답도 듣지 않고 입술을 묻었다. 밑에 깔린 자 역시 말로 대답할 생각은 없는 듯 그의 목덜미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긴다. 그들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쉬워서 어쩔 줄 모르고 서로를 빨아 당기며 바짝 달아오른 혀를 통하여 체온을 나누었다.
지쳐서 일어났을 때는 영원을 공유한 기분이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침대위에서 논 시간은 실상 5분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네가 벌인 짓은 루시안에게도 알려서 모든 청구서를 다 네 앞으로 보낼 테니까 그것도 알아둬.”
입술에 남아 반들거리는 타액을 훔치면서 란지에가 그렇게 말했다. 놀랍게도 차갑게 식은 목소리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그는 방금 전까지 난잡한 키스를 나눴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는지 동요라고는 머리털끝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루시안에게 말한다고? 그럼 난 보리스 진네만에게 맞을 준비를 해야겠는데?”
조슈아도 마찬가지였다. 금방 그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떨어뜨리던 사람과 동일인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태연했다.
“그럴 리가.”
그러자 조슈아가 눈을 부릅뜨며 손을 휘저었다.
“아냐. 넌 못 봤지? 루시안이 다쳤을 때 보리스가 어떤 눈을 하고 복수의 칼을 휘둘렀는지?”
잠깐 상상해보던 란지에는 그래도 웃으면서 ‘너는 좀 혼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했다. 조슈아는 하하- 하고 질린 얼굴을 했다.
놀리는 것도 잠시고, 란지에는 적나라하게 구겨진 자신의 교복을 내려다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곧바로 삐뚤어진 타이를 수습하면서 거울을 찾았다.
“진짜, 거울이 필요해. 엉망진창이야.”
조슈아는 작게 웃으면서 서랍장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고 옆에 앉아서 여기 헝클어졌다- 하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주더니 또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저기 봐라. 저기.”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차가운 바닥에 몸을 내던진 채 주인을 원망하고 있는 교과서가 보였다. 란지에는 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정말로, 정말로, 떠나려고 문 앞에 선 란지에는 배웅하는 자에게 짧은 조언을 보냈다.
“내가 볼 땐 보리스보다 막시민 리프크네가 더 가만있지 않을 것 같거든.”
“막군이?”
“그가 어떤 눈으로 젤리를 노려봤는지 네가 봤다면 넌 벌써 도망갔을 거야. 하지만, 넌 그의 오랜 친구라고 했으니 죽이기야 하겠어.”
“…….”
갑자기 조슈아의 등골이 서늘해진다. 대충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상상해보니 끔찍한 응징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공포가 드리워진 조슈아의 허연 얼굴을 바라보는 란지에는 무척 즐겁다. 오랜 친구가 무서워 달달 떨고 있는 그의 옆머리를 매만져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의 명복을 빌게.”
그리고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아직 촉촉한 입술로 도장을 꾹 찍었다. 이게 뭐지? 뭔 일 있었냐는 듯 시침 뚝 떼면서 얼른 물러나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어설프다. 하지만 완벽한 기습이었다. 넋이 반쯤 나가서 자신의 입술을 더듬는 조슈아를 뒤로 하고 란지에는 옆구리에 교과서를 낀 단정한 학생의 모습으로 문을 열면서,
“그럼 나중에 강의실에서 보자.”
실로 농염한 미소를 남기고 사라진다.
혼자 남은 조슈아는 천천히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대었다. 장미가, 그냥 장미도 아닌 무척이나 특별한 장미가 남긴 미소의 잔상이 서서히 징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실실 웃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미소를 잘게 쪼개면서 조슈아는 천천히 머릿속으로 수확을 정리해본다. 이거야 원, 풍작도 이정도면 사기인데?
콩닥 콩닥.
아니 그보다 좀 더 굵직하게 심장이 뛰고 있다.
아마 지금 떠난 그 사람도 똑같겠지.
심장 두개는 나란히 뛰고 있었다. 그 불규칙한 박동은 멀리 떨어져있는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서로의 소리를 찾아 맞춰나간다. 그리곤 어느 새 하나로 합쳐진다.
“명복을 빈다고 해놓고는 강의실에서 다시 보자고? 너무 제멋대로잖아.”
조슈아는 이마를 짚었다. 잠시 그러고 서서 입술에 남은 감촉을 더 즐기다가 그가 남겼던 마지막 말이 떠올라 정신이 퍼뜩 들었다. 당장 달려가 옷장 속을 살핀다.
있다. 여벌의 교복이.
그는 씨익 웃었다. 그 미소는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조슈아 폰 아르님만의 것이었다. 오랜 시간 남의 얼굴만 빌려 쓰다 드디어 자신의 것을 찾아서, 그래서 너무 기뻐서 저토록 아름답게 웃는 것이라 감히 생각해본다.
세계를 다 손아귀에 쥔 성취감에 들떠서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갈아입던 그는 푸드득- 하고 창가에 내려앉은 작은 새에게 눈짓하더니,
“역시 루시안에게 복구 작업을 좀 늦추라고 그렇게 일러두는 게 좋겠어. 그렇지?”
혼잣말 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지금부터 만나러 가볼까?
* * *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검고 차디찬 공간.
하지만 이젠 없다.
없기에,
- 그들은피하지않고부딪치는길을택했다
Naked Hearts.
마음을 드러내고.
Fin.

